해마다 이맘 때면, 바닷가에 사는 동생이 온다. 시댁 식구들 챙기기에도 버거울 텐데, 찬 바람 불고 첫눈 내리는 시절이 오면 어김없이 친정으로 한 달음에 달려온다. 친정 엄니와 친정 언니, 말썽꾸러기 오빠 그리고 딸린 식구들 위해 김장김치 잔뜩 싣고 온다. 일명 <2024 김장김치 대작전>의 서막이 오른다.
지난 주말에 동생네가 다녀갔다. 매제와 조카들까지 총출동. 11인승 큰 차에 백 포기 김치 가득 싣고 왔다. 체구는 자그마하지만 손 크고 통 큰 건 엄니를 닮았다.
동생네가 도착하면, 허당스런 친정 오빠는 괜스레 분주해서 이리저리 부산한데, 임꺽정 저리 가라 팔순 중반 노모는 컨트롤 타워 높은 곳에서 고고히 전체 상황을 진두지휘 하신다. 소분할 김치 통 정리하고, 비워 놓을 김치 냉장고 공간을 미리 예정하신다. 손자손녀들에게 나누어 줄 공급망과 김치의 예민한 숙성도까지 감안하시어 배송시점을 스케쥴링하고, 포장의 견고성 마저 꼼꼼히 검수하신다.
세상 도움 안 되는 오빠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잔 심부름
이나 하거나, 우와. 오오. 감탄사나 연발하다가 가족 단톡방
에 총평의 마무리 문장 하나 올리는 게 전부다. 이렇게.
"어느 평범한 집안의 소박한 김장김치라 읽고, <한 해의 정성>, <한 해의 사랑>이라 명명합니다. 가족의 사랑이 계절보다 깊어갑니다. 맛있게 먹고 식구들 모두 내년 한 해도 사랑하고 건강합시다." 하여튼 입만 살았다.
봄부터 고추 심고, 장마 오고 태풍 지나 여름 마당에 널어 말려 빨간 가루 만들고, 바닷물 끌어와 배추 절이고, 가을 풍미 가득 담아 눈보라 찬바람 속에 꼼꼼히 속 채워낸 김장김치에는 우리네 사계절이 고스란히 담겨있으니, 마땅히 한 해의 정성이고 가족의 사랑이겠다.
겉절이와 속박지, 최상급 액젓까지 펼쳐 놓고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추억한다. 코 흘리며 오빠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던 꼬맹이 동생이 어느새 시댁과 친정, 수십 명의 겨울을 책임지는 생활의 달인이 되어 있으니, 식구들 건강 챙기는 정 깊은 어른이 되어 있으니, 참으로 대견하고 고마운 일이다. 덩달아 난 참 복 받은 녀석이구나 싶다.
"세상 희귀하다는 동생복!"
이맘때마다 김장에 여념이 없을 이 땅의 어머님들, 따님들, 며느님들 그리고 어설프게 괜스레 부산스럽고 크게 도움 안 되는 아빠들, 오빠들, 아들들 모두에게 힘찬 응원을 보낸다. 김장은 우리 모두의 프로젝트이고, 그 자체로 축제이거나 또는 홀로 겨울을 맞이하는 이웃과도 나누는 따스한 동네잔치다. 어느 플랫폼에서 뚝딱 주문하고 배달받아 먹는 김치하고는 본질이 다르다.
사는 일이 복잡하고 시대가 바뀐 지 오랜데, 스마트폰으로 모든게 이뤄지는 생활 체계가 메인 스트림인 이 마당에 세상 물정 참 모르는 아저씨라고 욕해도 좋다. 김장이 무슨 애들 장난 같으요? 얼마나 고된 일인데, 요즘 누가 김장합니까?라며 따져물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나는 내 동생이 그저 고맙고 마냥 자랑스러울 뿐이며, 많이 버거웠을 텐데 몸살 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뭐라도 하나 도움 못되어 미안할 뿐이다. 우리 온 가족이 그 깊은 사랑과 정성을 기억하고 감사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은 그래도 이런 정을 나눌 수 있는 것도 어쩌면 축복이겠지 싶다. 그러니, 문학도로서 한 마디 더 얹어본다.
"김장김치는 우리네 삶의 클래식이자 고전이다. 눈물겨워 힘들 때마다 의지하는 철학이다."
이로서 월동준비가 끝났다. 모두 함께 감사하고 축복하자. 환하게 웃으며 기념촬영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