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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들자

by 김호섭


매일 공원 산책을 하면서도 나는 올 가을을 애써 외면해 왔다. 금방 추워질 텐데 뭘... 나무도 새도 낙엽도 금세 떠나겠지. 어차피 스쳐 지나갈 계절인데 마음 줘서 뭐 하나 싶었다. 오매불망 기다려 온 기대와 서둘러 떠나리라는 허망사이의 간극이 너무 크다 보니, 저 혼자 애절한 마음 다 집어 치고 어디론가 도망쳐버려 그 속상함을 일부러 마주하지 않으려는 회피랄까. 이런 마음상태를 전문용어로 뭐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 마음을 짝사랑에 가까운 마음부림이라 규정해 본다.

마치, 오래도록 마음속에 품은 여인에게 한마디 말도 못 하고 애만 끓이던 머스마가 '에휴...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인간에게 저렇게 찬란한 여인이 가당키나 하겠어. 혹여나 마음 줬다가도 금세 떠나버릴걸...'라며 애써 외면하는 그런 마음말이다.




"저... 아저씨. 우리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시겠어요?" 자판기 커피 마시며 멀거니 서있는 나에게 두 여인이 말을 걸어온다. "아... 네. 그럼요. 그러죠." 중년의 두 여인은 낙엽 속에서 포즈를 취한다. "차알알칵"

갤럭시 화면에 잡힌 장면. 그녀들은 영락없는 여고 동창생의 모습이다. 예상컨데 수십 년 전 그들은 분명 단짝 짝꿍이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참으로 오랜만에 미소가 올라온다. 몇 장 더 찍어 드리자.
"저기... 와~!!! 하면서 낙엽을 하늘로 한껏 뿌리면서 웃어 보세요." 뜬굼없는 나의 멘트에 여인들은 "와~!!!" 하면서 낙엽을 하늘 높이 쏘아 올렸다. 그녀들의 미소가 하늘에 오른다. "우와~! 너무 멋지게 잘 찍으셨어요. 감사해요." 여인들은 호호 깔깔 명랑하게 웃으며 총총히 사라진다. 오늘 이 장면이 그녀들에게 새로운 추억의 기억으로 남게 되리라는 나의 예상은 흐뭇하다.

좀 식었지만 남아있는 커피를 마신다. 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고 이제서야 가을하늘을 보았다. "와~!!!"하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 낙엽의 잔상이 선명하다. 쨍한 어지러움. 그래. 온 세상이 가을이었다. 고맙게도 가을은 가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가을은 이렇게 누구에게나 열려있었다. 이 머스마에게도.




이래저래 사는 일이 무겁고 쓰는 일이 버거워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땐, 고개를 들자. 하늘을 보자. 삶에 지치고 잔뜩 위축된 어깨 쫙 펴고 다시 나를 보자. 씩씩했던 우리를 보자.

삶은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
먼지 같은 퍽퍽한 일상에서도 오늘의 아름다움을 찾는 일
공들여 보는 일
꿈. 사랑. 행복. 찬란. 그게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나랑은 상관없다고 회피하지 말고
자꾸 들여다보고 보듬고 쓰고 나누는 일
고난과 마찬가지로 정면으로 마주 해야 하는일

당당히 구해야 하는 일
꼭 안아줘야 하는 이야기
우리들의 오늘이다

여고 동창생들이 사방으로 펼쳐놓은 낙엽을 찬찬히 그러모았다. 모양새는 그다지 예쁘지 않지만 이 아이도 엄연한 하트다.

"차알알칵" 이 사랑을 보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2025 가을에게 그리고 오늘의 나에게.

#가을 #사랑 #가을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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