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는 선생님
어려서부터 수시로 바뀌던 장래희망 중, 단 한 번도 꿈꾸지 않았던 딱 하나의 직업은 바로 '선생님'이었다.
아니, 선생님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되지 않을 거라 결심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공부할 때 그들이 잘 모르는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해주면, 친구들은 내가 선생님 같다고 했다. 각자의 진도에 맞추어 차근차근 알려주고, 친구들의 각종 고민을 제법 잘 들어줬던 편이라 그랬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할 때도,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종종 교대나 사범대 진학을 권하셨다. 그러나 누가 나보고 '선생님 같다' 혹은 '선생님 하면 되겠네'라는 말을 하면, 겉으로 티는 못 냈지만 속으로는 질색팔색을 했다. 선생님이 될 바에야 평생 백수로 지내겠다는 철없는 생각도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선생님'은 결코 되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이 되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심의 결정적 이유는 바로 '아빠'였다.
아빠는 30년을 넘게 중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이었다. 잘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아빠가 선생님이면 얼마나 좋겠냐고 종종 말했다. 특히 내가 중학교에 진학하고부터는, 아빠가 학교에서 실시간으로 파악해 알려주는 생생한 중학교의 공부나 시험 정보들을 부러워했다. 문제집이나 참고서는 집에 쌓여 있었고, 영어 듣기 평가 테이프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다. 아빠가 가르치는 영어뿐 아니라 수학, 과학, 사회 등 다른 과목 선생님들에게 받은 자료도 한가득이었다. 때로는 아빠의 착각으로 두 권씩 집에 가져온 같은 종류의 참고서를 친구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학교는 달랐지만 시험 범위나 시험 기간, 자주 출제되는 문제 유형도 아빠가 미리 파악해 알려주기도 했다. 변화하는 입시 정보나 전략은 선생님인 아빠가 빠삭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어렸을 때부터 영어 팝송 노래를 집에 틀어놓아, 내 귀가 일찍 트인 것도 아빠 덕분이긴 하다.
하지만 아빠가, 혹은 엄마가 선생님인 집안의 자녀들은 공감할 것이다.
선생님과 한 집에 산다는 것의 어려움을 말이다. 실은 '성적을 부탁해, 티처스'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이번 출연 학생이 한 말에 공감이 되고 옛 기억까지 떠올라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고2 학생은 떨어지는 성적에 대한 고민으로 출연했는데, 이 학생의 엄마는 25년 차 고3 영어 선생님이었다. 제대로 된 공부 대신 말로만 공부를 하는 아들을 답답하고 안타까워하는 엄마는, 아들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맞춤 시험지도 만들어주고, 단어장도 주며 아들에게 온 신경을 쏟는다. 이 과정에서 잔소리가 안 나올 수 없다. 아이는 엄마의 방식을 싫어해 자신이 원하는 공부법 대로 알아서 한다고 했고, 입시 전문가인 엄마는 아이를 볼 때마다 속이 터진다. 제작진은 아이를 인터뷰하며 엄마에 대한 감정을 물어봤는데, 아이의 대답은 이러했다.
"엄마랑 같이 사는 건, 집에 와도 선생님이랑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이 말 한마디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아 맞아!'를 외쳤다. 선생님인 아빠는, 가끔씩 집에서도 선생님 그 자체였다. 원래 부모님들이 그런 건지 아빠가 선생님이어서 그런 건지는 지금도 조금 헷갈리긴 하지만, 때로는 아빠가 아니라 우리 담임 선생님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교사 자녀로서 살면서 힘든 점 중, 가장 처음 고발하고 싶은 것은 바로 '조기교육'이다.
강원도 시골에 살며 유년기를 보내던 시절, 당연히 사교육의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아빠가 선생님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단칸방에서 네 가족이 살던 때부터, 우리 집 한쪽 벽면에는 가나다라와 알파벳이 적힌 달력 뒷면 종이가 늘 붙어 있었다. 물론 아빠가 직접 한 글자씩 써서 붙였을 테고, 알파벳을 외우는 건 자식들 몫이었다.
"에이, 삐, 씨, 디~~~" "애쁠(apple), 버네너(banana), 카알(car)~~~~"
나와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아빠에게 칭찬받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영어를 열심히 익혔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어 조기 교육을 받은 것이다. 매번 집에 틀어놓던 팝송 중 내가 어떤 노래에 관심을 보이기라도 하면, 아빠는 학교에서 가사를 프린트 해와 나에게 해석을 시키기도 했다. 단어장을 만들어주며, 내가 외웠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영어 단어 뜻을 물어볼 때도 있었다. 그것도 밥상에서...
덕분에 영어 성적은, 큰 노력 없이도 잘 나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성적과는 반비례로 고등학교 때부터는 영어가 몸서리치게 싫어졌다. 어렸을 때부터 선행학습을 해오니, 질려 버려서 쳐다보기도 싫었달까. 지금의 대치동 진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겠지만, 먼저 배운 부작용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학선생님을 엄마로 둔 친구도, 어렸을 때부터 배운 수학이 싫어 문과를 선택했다고 말했다.
두 번째는 '잔소리'와 '매'이다.
선생님은 기본적으로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했던 말들을 고스란히 집으로 옮겨와 반복하면, 듣는 자녀는 참 괴롭다. 오늘 우리 담임 선생님한테 들었던 훈화 말씀과 차이가 전혀 없는 '좋은 말'들.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들어야 했던 잔소리들. 집에 사운드가 비는 순간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잔소리로 자녀가 교화되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사랑의 매'가 동원되었다. 내가 처음 맞았던 기억은 7살쯤이었던 것 같은데, 잘못을 하고도 빌지 않는 내가 괘씸했는지 종아리에 멍이 들도록 맞았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당연히 때려야 한다고 믿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 집에는 아빠의 직업상 매의 종류도 참 많았다. 싸리나무, 대나무 등으로 만든 매뿐만 아니라 플라스틱 자, 단소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얇은 나뭇가지로 매를 맞다가 부러지면, 금세 다른 매로 교체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내가 맞은 경험은 실제로 5번 안팎이라고 했지만, 나는 절대 믿을 수 없다. 그만큼 매 한번의 기억은 크게 각인되어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억울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러나 잔소리가 나은건지 매가 나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 친구 아빠도 선생님이었는데, 성적이 떨어지거나 잘못을 하면 때리는 대신 '티타임'을 갖는다고 했다. 그때마다 차를 마시며 잔소리를 듣는데, 차라리 한 대 때려달라고 하고 싶다 했다. 매야 잠깐 맞고 아프면 그만이지만, 티타임 내내 아빠의 질문과 잔소리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결국 그 친구는 커서는 절대 차를 마시지 않게 되었다. 차만 마시면 예전 아빠와의 티타임이 떠오르는, '티 트라우마'라고 하며 웃었다.
아이들도 예쁘고,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특히나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 그렇게 흐뭇하고 기쁘다. 참 아이러니 하지만 선생님의 자녀로 같이 살다보니, 선생님은 절대 되고 싶지 않았다. 아빠가 집에서 선생님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싫었다. 성적으로 잔소리를 듣는 것도, 나보다 내 성적을 빨리 아는 것도 아빠가 선생님이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가 크면 절대 아이를 때리지 않으리라는 결심도 그때 한 것 같다. 그러나 아빠는 나의 이런 마음도 모르고, 매번 나에게 선생님이 되라고 했다. IMF를 지나고 온 나라가 힘든 시절이라, 안정적인 교사의 진로를 걷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아빠 스스로도 교사가 되기를 꿈꾼 적은 없었다. 엄했던 할아버지의 한 마디 말 때문에 그리 된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이 되어, 찢어지게 가난한 유년기를 보냈을 때와는 달리, 네 명의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으니 자신의 직업에 대한 감사함이 생겼다 한다.
40대 중반, 다시 진로를 고민하는 시점이 되니 마음 속 갈등이 생긴다. 내가 새로이 가고자 하는 길도 큰 범주로 보면 선생님과 유사한데, 아빠에 대한 반항심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이게 맞나 자꾸 검열하게 된다. 선생님의 자녀는, 선생님이 절대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