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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풀림 Oct 22. 2024

온기를 나누는 저녁, 아롱사태 전골

따스함이 필요한 요즘

공기가 선선하다 못해 제법 쌀쌀하게 느껴지는 가을 저녁이다.

무더위에 에어컨을 차마 끄지 못한 채 9월을 넘긴 것 같은데, 벌써 추위를 걱정할 때가 오다니.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영원할 것 같던 시간도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는 걸 실감한다. 아침저녁 출퇴근 길에는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고, 몸은 자꾸만 움츠러든다. 사무실에 오자마자 습관처럼 마시던 얼음 가득 시원한 아이스 라떼는, 어느새 따뜻한 우유가 듬뿍 담긴 라떼로 바뀌었다. 매일 아침 20분을 걸어 학교를 가는 아이에게도, 감기 걸리니 긴 옷 좀 챙겨 입고 가라 잔소리를 하게 된다. 집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예상 못한 서늘한 바람이 들어와 팔다리에 오스스 소름이 돋는다.


저 멀리서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할 때, 나는 두툼한 겉옷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뜨끈한 국물' 요리이다. 외투는 나 혼자만 입는 개인형 보온 장비라면, 뜨끈한 국물 음식은 먹는 사람 모두를 포근하게 만들어주는, 정서적이고 물리적인 발열체이다. 따뜻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그러나 너무 뜨겁지도 않은 온도의 국물 말이다.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으면, 그 온기가 입안을 거쳐 목구멍까지 퍼지며, 온몸을 따스히 덥혀 준다. 쌩쌩 부는 칼바람에 코가 시리고 휑해지는 마음을, 뜨끈한 국물이 사르르 녹여준다. 이것만 마시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해 주는 느낌이다. 아마도 서양인들에게는, 감기몸살에 걸릴 때마다 먹는다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가 그런 존재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세 식구로 이루어진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식탁에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토요일 저녁이다.

평일에는 나의 야근으로, 주말 아침에는 남편의 취미 활동으로, 딸랑 셋밖에 되지 않는 인원임에도 식사를 같이 할 기회는 많지 않다. 게다가 집순이인 딸도, 이제는 친구들과 놀러 가는 재미를 붙여 얼굴 보기가 더 힘들어졌다. 그래서 토요일 저녁만큼은 집밥을 차리고, 가족들을 식탁 앞으로 불러 모은다.

토요일은 엄마가 요리사인 날이라 메뉴 선정도 내 마음대로인데, 쌀쌀한 바람을 맞고 퇴근한 금요일 이미 마음속으로 요리를 정했다. 내 몸과 영혼을 덥힐 뜨끈한 국물 요리이면서도, 남편과 딸이 좋아하는 고기나 단백질이 주가 되는 음식. 바로 아롱사태 수육 전골이다. 채소를 선호하는 나의 식성과, 고기 없이는 밥을 안 먹는 남편과 딸 모두의 입맛을 충족시켜 주기에 딱인 메뉴다. 여기에 호로록 넘어가는 당면까지 추가하면 금상첨화.


아롱사태 수육 전골은 가정집보다는 술집에서 더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식이다.

우선 무한 소주를 부르는 술안주이기도 하고, 집에서 해 먹자니 어렵고 번거로울 것 같기 때문이다. 아롱사태라는 이름부터 뭔가 낯설다. 그러나 이것만큼 손쉬우면서도, 손님 초대 음식으로도 제격인 요리가 없다. 간단히 말해, 고기 삶고 썰고, 채소만 넣어서 5분 더 끓이면 끝! 요리 난이도로 따지자면 '중'보다는 낮고, '하'보다는 살짝 높은 정도다. 겁먹을 것 없이 한번 도전하고 나면, 앞으로도 계속 만들게 될 수밖에 없다. 대충 만들어도 맛에 큰 지장이 없고, 전골 요리답게 하나의 냄비 만으로도 식탁에서 큰 존재감을 뽐낼 수 있어서다.


과정이자 가장 중요한 관문은 고기 삶기.

이를 위해서는 우선 마트나 정육점에서 덩어리로 된 아롱사태를 사야 하는데, 이왕이면 한우를 추천한다. 맑고 슴슴한 아롱사태 전골은, 고기의 신선도가 맛의 전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지났거나 해동이 제대로 안 된 소고기를 쓰는 경우, 누린내 때문에 국물 맛을 흐릴 수 있으니, 재료 선정에는 조금 더 신경 쓰자. 잘 모르겠으면, 정육 코너 직원분께 물어보고 좋은 고기를 추천받으면 된다. 다행히 치마살이나 등심 같은 구워 먹는 부위보다는 저렴한 가격이라, 지갑 부담도 조금 덜하다.

좋은 고기를 사 왔다면, 전기밥솥에 물을 붓고 50분간 만능찜 버튼을 누르면 된다. 고기와 물만으로는 누린내가 날까 두렵다면, 파나 월계수잎, 후추 같은 향신료를 같이 넣어주면 좋다. 조리한 지 20분만 지나도 소고기의 구수한 냄새가 온 집안에 퍼져 나가, 방에만 처박혀 있던 딸이 '이게 무슨 냄새야' 하고 킁킁대면서 제 발로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는데, 절대 전기밥솥에 물을 2/3 이상 넣지 말 것! 국물에 환장하는 나는, 매번 소고기 육수를 조금이라도 더 뽑고 싶어 물을 넉넉히 넣는다. 직접 경험하면 알게 되겠지만, 이 경우 찜 마지막 과정 밥솥 추가 팽글팽글 돌아갈 때부터 조리가 완료될 때까지 집안이 난장판이 된다. 물받이에서는  육수가 넘쳐 흐고, 돌아가는 추에서도 육수가 뿜어져 나와 집안에 분수처럼 퍼진다. 진득한 기름기와 누린내가 밥솥은 물론 저 멀리 거실 바닥까지 베는 것은 물론이다. 만약 남편이 이 광경을 봤다면, 최소 3시간 동안 잔소리를 할 수도 있다.


압력 밥솥의 힘으로 야들야들하게 삶아진 고기는 한 김 식힌다.

인생에도 쉼표와 기다림이 필요하듯, 뜨겁기만 한 고기도 잠시 찬바람을 쐬며 여유의 시간을 갖는다. 갓 삶아낸 고기를 잘못 썰다가는 으스러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동안, 전골 안에 들어갈 채소를 준비하면 지루하지 않다. 냉장고에 굴러다니는 아무 채소나 써도 되지만, 꼭 빠져서는 안될 재료가 있다. 바로 부추와 팽이버섯. 초록색 부추와 흰색 팽이버섯을 손가락 한 마디만큼 썰고, 냄비에 삥 둘러 예쁜 모양새를 낸다. 가운데는 미리 익혀 불린 당면과, 반듯하게 썬 고기를 올려 육수 내고 보글보글 끓이면 끝이다. 간은 국간장이나 액젓, 소금 등 기호에 맞게 살짝만 해주면, 엄마표 보양식 완성이다.

만약 한 단 사온 부추가 많이 남았다면, 갖은양념 넣고 조물조물 무쳐 같이 상에 내보자. 고기 국물의 느끼함을 잡아줄 신의 한 수가 될 테니.


이렇게 만든 아롱사태 수육 전골은, 식탁에 다 같이 둘러앉아 냄비에 머리를 박고 먹어야 제맛이다.

이미 넉넉하게 넣은 고기지만, 아빠가 다 먹어치울까 경계하며, 육식파 딸은 열심히 젓가락질을 한다. 고기만 먹으면 퍽퍽할 수 있으니, 소고기의 영양이 몽땅 녹아져 나온 국물도 함께 마신다. 전골에 넣은 부추는 은은한 한약 향기가 나는 것 같고, 팽이버섯은 국수처럼 호로록 넘어간다. 투명한 당면은 육수를 머금어 매끄럽고 촉촉해졌다.

분명 해가 지는 아까까지만 해도, 창문을 닫으며 춥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국물을 나누어 먹다 보니 금세 몸에 온기가 돈다. 너무 열정적으로 먹었는지, 이마와 콧잔등에 땀도 송골송골 맺힌다. 1kg의 소고기는 금세 없어지고, 진한 육수도 바닥을 보인다. 우리는 우물우물 소고기를 씹으며, 푹 익은 부추를 건져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딸은 학교 체육대회 때, 반별로 캐릭터 단체 춤을 추며 입장하던 순간을 묘사했고, 남편은 이에 질세라 크고 웃긴 동작을 따라 하며 우리를 깔깔대게 만들었다. 일상을 스치는 별 것 아닌 기억들이, 아롱사태 전골과 함께 식탁에 오르니 따스하고 특별한 추억으로 바뀐다.

어쩌면 온기를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 아닌가 싶다. 따스한 국물 덕분에, 그리고 주말을 함께 하는 가족 덕분에, 곧 다가올 겨울이 무섭지 않다.


#몹글 #몹시쓸모있는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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