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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리 Oct 17. 2022

마음에 틈이 필요한 이유

내가 치앙마이에서 찾은 틈

Letters from Thailand (2)




2주의 시간이 생겼다. 3년을 꽉 채워 다닌 것에 대한 선물로 회사로부터 2주간의 리프레시 휴가를 받았다.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그러나 직장인에게는 황금 같은 2주.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2주 동안 여행을 갈까?(3년 만에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는데! 좀 멀리 나갈까!) 

어디 가지 말고 그냥 쉴까?(사실 놀기보다는 정말 쉬고 싶었다..) 

휴가는 언제 쓸 수 있을까?(휴가 갈 틈도 없이 일은 줄어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올해 여름까지는 대규모 프로젝트로 바빠서 리프레시 휴가를 쓸 수 없었고, 8월이 되자 팀이 바뀌고 9월에 또 팀이 바뀌고.. 맡은 일을 놓고 쉽게 떠나지 못하는 성격상 이러다가 휴가를 못 쓰거나 계획이나 대책 없이 휴가 쓰고 일을 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2주의 꽤나 긴 시간이 생겼기에 사랑하는 유럽에 가는 것도 생각했으나 2주 내내 떠나 있고 싶지는 않았다. 많이 지쳐있었던 모양이다. 인풋으로 채우기보다는 나의 내면세계를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1주 정도를 여행하고 1주 정도는 쉬는 것이 적절할 것 같았다. 1주 동안 어딜가지? 마침 코로나 직전에 계획한 해외여행이 방콕 여행이었고, 마침 10월에 친구가 출장으로 방콕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10월은 연휴가 많아 동료들도 쉬니까 조금 덜 미안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10월 초, 태국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떠나기 전 내 마음에는 여유나 틈이 없었다. 대규모의 장기 프로젝트로 몸과 마음이 많이 상해 있었고 시간은 그런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끌고 갔다. 계속 할 일이 있었고 해 내야 하는 일들이 있었다. 매일매일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몰랐지만, '이대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는 없어 보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번아웃과 무기력의 반복이었다. 이 굴레를 끊어 내고 싶은데 어떻게 끊어 내야 할지 몰랐다. 


그런 상태로 떠나온 여행이었다. 계획은 없었다. 여행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 일상생활 중에 여행 계획을 할 시간적 마음적 여유가 없었다. 함께 떠난 친구도 마찬가지였다. 시간 단위로 계획을 세우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계획적인 둘이 역사상 가장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 이번 여행이었다. 그래서 불안하기도 했다. 어느 정도는 어디에 뭐가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머리에 그려져야 하는데 아는 게 없으니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다행이었다. 알고, 보면,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비우고 정돈하러 떠난 여행이었기에 모르는 편이 나았다. 덕분에 매일을 최소한의 것들로만 채웠다. 오늘은 마사지받고 쉬기! 오늘은 쿠킹클래스 갔다가 야시장 가기! 오늘은 요가 클래스 갔다가 카페에서 시간 보내기! 물론 부지런히 일어나 이것 외에도 다른 것들을 하긴 했으나.. Must do 리스트가 단촐해지니 마음에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치앙마이 쿠킹클래스

쿠킹클래스는 5시간 동안 진행되는데, 5시간 동안 우리가 할 일은 요리하고 먹고 쉬는 것뿐이었다. 정말로 5시간 동안 애피타이저 1개, 메인 요리 2개, 메인 커리요리 1개, 디저트로 망고 스티키 라이스까지 총 5개의 요리를 하고 앉아서 먹고 산책하며 쉬는 일만 했다. 그날 내가 할 일은 먹고 쉬는 게 전부였다. 사실 그것들을 '일'이라고 지칭하기도 애매하다. 그냥 느리게 먹고 놀았다. 우리가 요리 수업을 들은 공간은 멋진 나무로 만든 개방된 스튜디오였다.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닌. 비는 막아줄 수 있지만 바람이 통하는 외부 공간. 활짝 열린 커다란 틈 사이로 바람이 살랑였다. 다소 습하고 더웠지만 바람결을 느끼기에 충분한 날씨였다. 밥 먹고 소파에 앉아 나뭇잎과 햇살을 바라보다 아이들이 뛰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살짝 잠이 들기도 했다. 신선한 재료로 즐겁게 요리를 해서 나를 잘 챙겨 먹이는 일.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행복을 오랫동안 잊고 지냈었구나. 낯선 타국에서 낯선 재료로 만든 음식이었지만 행복과 여유와 즐거움이 담겨 참 맛있기도 했다. 



치앙마이 요가 클래스

"내일 아침에 요가 클래스 참석하고 싶은데 2명 자리 있나요?"


전날 구글링을 해서 찾은 요가원. 이런 즉흥적인 예약은 서울에서 사실상 불가하다. 서울에서는 조금 유명하고 좋은 공간은 전부다 '예약 전쟁'이다. 꼭 서울만의 이야기는 아니겠지. 웬만한 대도시에선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모든 일을 미리 계획하고 미리 예약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죄송합니다 예약이 마감되었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해서 듣다 보면 좌절감과 패배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치앙마이에선 그렇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 와도 되고, 1인당 250바트면 원데이 클래스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여행자들이 자주 왔다 가는 요가원이라 그런지 같이 수업을 듣는 모든 이들이 여행자였다. 머무는 기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는 우리처럼 4일 정도 머물기도 하고, 한달살이를 하는 부부도 있었고, 여행으로 떠나온 곳이 일상이 되어 더 길게 머무는 여행자도 있었다. 수업이 시작되자 온 몸 구석구석을 풀었다. 늘 노트북 앞에 움츠려있던 몸이 이완되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소리를 들으며 치앙마이에서 하는 요가가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보시라! 요가 수업이 끝날 무렵 하늘이 찢어진 듯이 비가 더 많이 오기 시작했다. 우린 당황스러웠지만, 오래된 여행객과 요가 선생님은 당황하지 않았다. 차를 끓일 테니 마시고 가라고 하셨다. 말투와 표정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 동안 홍콩에서 온 여행객과 치앙마이의 여유로움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 사람들은 일을 너무 많이 한다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홍콩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만.. 어딜 가나 단골 주제, 한국인 = 워커홀릭) 그녀의 남편은 치앙마이에서 평생을 살고 싶어 한다고 했다. 나는 치앙마이가 조금 지루해지던 참이었지만, 도시 자체가 주는 여유로움이 있기에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치앙마이에서 산다면 어떨지 상상하며 요가원을 나왔다.




우기의 태국은 자주 비가 내렸다. 우기에 여행을 오는 바람에 치앙마이에 머무는 내내 맑은 하늘 한 번 보지 못할까 봐 속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감사'를 올려드렸다. 여행을 할 수 있음에, 좋은 시간을 주심에, 감사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살짝 덧붙여, 맑은 날도 허락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다음 날은 놀랍게도 엄청 맑았다. 맑은 날씨 덕분에 쿠킹클래스도 기분 좋게 했고, 야시장 구경도 편하게 했다. 누군가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할 수 도 있을 것이고 별 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날씨가 감사에 대한 하나님의 선물 같았다. 


그날 치앙마이 거리를 걷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정말 주님께 드릴 게 없는데 주님은 정말 내게 아낌없이 주신다고. 하물며 날씨처럼 사소한 기도까지도 이렇게 멋지게 응답해 주신다고. 내가 받은 복이 정말 크다고. 내가 무엇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까. 받은 만큼 드릴 게 없는데.. 드릴 건 정말 믿음밖에 없겠구나 하고. 이런 생각이 내게 생긴 틈의 증거였다. 


지난 몇 개월간 바쁘고 상태가 안 좋은 가운데 신앙생활도 스스로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매일 꾸준히 읽던 성경도 기도도 평소보다 멀어진 상태였다. 매일 아침을 겨우 일어나서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고 야근을 하고 쓰러져 잠들곤 했다. 그 전에는 바빠도 아침에 묵상할 틈을 만들었고 그 틈이 나를 살게 했는데. 빈 틈 없이 '해야만 하는' '일'로만 채워진 일상이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들을 미리 채워 넣지 않으면, 덜 중요한 것들이 다른 것을 채울 틈도 없이 인생을 채우고 만다. 우리에게 틈이 필요한 이유는 중요한 것을 먼저 채우기 위해서다. 내게도 다시 틈이 생기기 시작했다. 치앙마이에서 만든 틈은 2주간 조금씩 자리를 넓혀 넉넉해졌다. 나의 가장 좋은 첫 마음을 매일 매일 올려드리고 싶어졌고, 다시 그 루틴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많은 것들을 버렸고 버려서 생긴 틈 사이에 중요한 것들이 들어올 자리가 다시 생겼다. 타국으로 떠나오니 그리운 것들이 많았다. 가족들과 곧 가족이 될 오빠가 너무 보고 싶었다. 곁에 있었을 때는 다소 무뎌졌음을 인정한다.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늘려야겠구나, 오빠와 시작하는 새로운 인생에 더 감사해야겠구나 하고 많이 다짐했다. 익숙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새롭고 감사하게 볼 수 있는 좋은 여행이었다. 나쁜 에너지, 불평하는 말과 미워하는 마음은 버리고, 감사와 사랑으로 채워가고 있다. 내게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마음과 에너지를 쓰는 대신 소중한 사람들과 사랑하는 것들에 에너지를 쓰기로 다시 한번 결심한다. 




내가 치앙마이에서 찾은 것을 단순히 '여유'라고 정의하기는 아쉽다. 우선순위를 재정립할 '틈'을 얻었다. 끌려가는 대신 내 힘으로 걸어갈 속도를 찾았다. 틈이 없을 때마다 떠날 수는 없으니, 나만의 틈 찾는 방법을 기억해두려 한다. 


채우려 하기 전에 비울 것

나를 위해 정성스러운 음식을 대접할 것

햇살과 바람결을 느낄 것

상황과 상관없이 감사를 올려드릴 것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틈이 생긴다. 그 틈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자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한 일이다.


예전에 오은 시인의 시집을 사고 사인을 받았는데 짧은 글을 함께 적어주셨다. 그 문장으로 오늘의 편지를 마치려고 한다.




"틈을 내세요, 그 틈으로 빛살들이 들이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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