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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닐라맛 교향곡 Mar 13. 2021

인간의 선택에 바치는 찬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을 읽고

1. 들어가며

고등학교 시절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며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리학에 따르면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고, 어떤 사건에는 이유가 존재한다. 만약 고전 물리학이 상정하듯 모든 움직임이 법칙에 따르고 인과관계에 의한다면, 이미 세상의 운명은 결정지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우리가 내리는 선택을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고 말이다. 이는 학부 이후 대학원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도 마찬가지로 든 생각이었다. 형법상 죄에 대한 책임은 개인이 달리 행동할 수 있었음에도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에서부터 도출된다. 만약 이 세상이 인과의 사슬로 촘촘하게 구성된 시나리오와도 같은 결정론적 세상이라면 애당초 '죄'라는 개념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세계관을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는 삶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Bienvenue au Paradis)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심판]은 전술한 삶의 의미에 대하여 가치 있는 대답을 하려 노력한다. 희곡의 형식으로 쓰인 이 작품은, 주인공 아나톨 피숑이 죽음 이후 천국에 도착하여 자신의 삶에 대하여 재판을 받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나톨은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자신이 전생으로부터 미리 주어진 연극인으로서의 예술적 재능을 낭비하고 멋대로 판사가 되기로 선택한 것, 그리고 천생연분으로 운명 지어진 여성과 결혼하지 않고 그가 선택한 여성과 결혼한 것 등에 대하여 심판받는다. 천상의 판사, 검사, 그리고 변호사가 등장하는 이 희곡에서 아나톨의 죄는 미리 정해진 길을 따라 걷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대가로서 그는 다시 한번 지상에 내려가 인간으로의 삶을 살 것을 판결받는다.


흥미로운 점은 비록 죽음 이후 심판을 받으러 천국에 당도하였을지언정 천국은 많은 사람이 꿈꾸는 낙원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천국에서도 사람들 간 지상에서의 문제는 영혼들을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검사인 베르트랑과 변호사인 카롤린은 지상에서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였는데, 지상의 악연은 그들을 아직도 옭아매고 있었다. 나아가 피고인 아나톨은 스스로의 의지가 이끄는 대로 삶을 살았다는 이유로 다시 한번 지상에 내려갈 것을 판결받는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본 작품의 프랑스어 원제인 '낙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Bienvenue au Paradis)는 매우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사후세계는 낙원이 아니었을뿐더러, 아나톨을 반긴 것은 환영이 아닌 부당한 심판이었기 때문이다.


가정을 한번 해 보도록 한다. 만약 작중의 아나톨이 전생에서 주어진 바대로의 삶을 살았더라고 한다면 더 가치 있는 삶을 산 것인가? 그가 만약 판사가 아닌 연극인으로서의 삶을 살고, 운명의 짝인 동료 연극인과 사랑에 빠졌다면? 아나톨이 이미 인과관계가 못 박아진 결정론적인 삶을 살았다면? 혹자는 그러한 삶이 전술한 작중의 아나톨의 삶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단순히 운명 지어진 대로의 삶, 즉 자유가 결여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아나톨이 자신의 재능인 연극을 즐기며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자신이 천부적으로 좋아하고 끌리는 삶을 살았고 그는 필시 행복했을 것이다. 과연 두 삶 중 어떠한 것이 더 소중한 삶인가? 우리가 작중 판사의 역할을 짊어진다고 가정한다면 이는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3. 결정론과 자유의지

위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 애정 하는 영화 [메트릭스]에서 고뇌에 빠진 구원자 네오는  자신이 세계를 구할 영웅인지를 고민하며 세계의 시작부터 존재했고 모든 질문의 답을 알고 있다는 프로그램인 예언자 오라클을 찾아간다. 오라클은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확답을 주지 아니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모든 시작이 있는 것들에는 끝이 있고, 결국 이는 네오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네오는 이 아리송한 예언을 듣고 인간 세계와 기계 세계 모두를 구하는 메시아가 된다.

 

영화에서 네오의 '선택'은 운명이었을까 자유의지였을까. 만약 오라클이 설정상 그러하듯 메트릭스 상의 모든 것을 예측 가능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고 상정하면 그녀의 예언은 사실상 정해진 결론에 도달하는 하나의 이정표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그녀의 답을 들은 네오는 정확하게 운명 지어진바 행동할 것이고, 어찌 되었던 세상을 구원한다는 결론에는 도달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네오는 운명의 시종일 뿐이다. 반면 그녀가 일정한 미래 이상을 예측하지 못하는, 일종의 확률적 계산자에 불과하다면 네오는 희뿌옇게 점철된 미래를 자신의 손으로 쓴 진정한 의미로서의 영웅일 것이다.


나)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신통하기로 유명한 델피의 아폴로 신전의 신탁을 받으러 간 신도들은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른 다음에야 태양신의 사제들로부터 신의 진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 봐야 델피의 화산 기공으로부터 나온 연기를 들이마신 환각상태의 사제들이 내뱉는 헛소리를 옆의 비교적 멀쩡한 정신의 사제가 나름의 해석을 통해 요청자에게 전하는 것이었는데, 그리스인들은 이 신탁에 상당히 큰 의미를 부여했다. 페르시아와의 전쟁 당시 열세에 몰린 아테네군은 신탁을 청하게 되고, 아폴로는 나무 성벽 뒤에 숨으라는 신탁을 내린다. 아테네군 사령관인 테미스토클레스는 이를 목선에 탑승하여 승부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200척이 넘는 페르시아 군을 상대로 살라미스의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조국 그리스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게 된다.


과연 테미스토클레스는 조국의 구원자였을까? 알 수 없는 예언을 들은 그는 나름의 선택을 하게 되고 이로써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전쟁은 종국을 고하게 된다. 만약 결과가 결정되어 있었을 뿐이었고, 그리스 군의 지휘관 테미스토클레스가 단순히 운명 지어진바 행동한 것이라 가정하는 경우에도 그의 선택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이는 그의 전략이 순수한 자유의지에 기한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상황이던 열세를 극복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위대한 승리자로 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거인이 되었다.


생각건대 위 예시들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삼라만상이 예견된 바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이냐 아니면 자유의지에 따라 미래가 변한다는 비결정론인가의 논쟁에 관련한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선택에 부여하는 의미가 결정된 결과가 존재한다고 하여 퇴색되지는 아니한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는 동시에, 자유의지의 의미가 과대 포장되어 결정론의 희생 하에 숭배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요하자면 네오의 결정은, 테미스토클레스의 결정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어려운 상황에서, 필연에 기한 것이던 자의에 기한 것이던, 위대한 통찰력과 노력으로 점철된 소중한 선택인 것이다. 그리고 선택을 그 자체로서 가치 있는 것이다.


4. 인간의 선택에 바치는 찬가

그리고 바로 이런 인간의 위대한 선택에 대한 존중을 작가 베르나르는 [심판]에서 표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한다. 희곡의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 속에 피고인의 편을 드는 변호인과, 피고인을 기소하는 검사를 한 명씩 배치하여 논쟁하도록 한 것은 심판의 대상이 (결정된 삶이던 자유의지에 기한 삶이던) 한 인간의 선택에 의해 살아진 각기 다른 장단이 있는 소중한 삶이란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의도는 주인공의 환생하라는 판결에 순응하지 않고 천국의 판사로서 존재하겠다고 '선택'하고 자신을 판결했던 바로 그 판사와 역할을 바꾸기로 결정하는 장면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단순히 지상에서의 삶을 살게 하는 대신 주인공으로 하여금 천국에서 판사로서의 삶을 살도록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주체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배격하는 선택을 할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이는 나 자신의 삶에도 적용할 점이 많다. 내가 군에 입대한 것을, 어찌 보면 결정론적인 것이었다.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것이며, 그 누구라도 회피 없이 이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르나르가 보여주듯, 미리 결정된 운명이라고 하여 그것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급부적으로 그러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겠다고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빛을 발한다. 군에 입대하여 단순히 죽은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흘려보내는 복무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은 작가에 따르면 주체적인 선택이 결여되어 있다. 결정된 의무라도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로, 그리고 전역 이후의 삶을 준비하는 도움닫기로 준비하기로 '선택'한다면 의무복무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런 시련의 기회를 만들어준 절대자께 감사하며, 30이 넘은 나이로 규칙적인 생활과, 육체적 단련, 그리고 사회생활의 센스를 각인시켜주는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기로 했다.


요하자면 [심판]은 스스로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선택을 할 것을 주문하는 작품이다. 운명이던 자유이던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핵심은 자신이 삶을 흘려보내지 않고 선택하며 주체적으로 살아내는 것이며, 인간의 삶은 그러한 적극적인 선택으로부터 스스로 빛난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므로 나 또한 남은 복무를 스스로 선택하는 삶으로 살아내고자 한다. 주인공 아나톨이 그러했듯 말이다.





*본 감상문은 영내 진중문고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양질의 도서를 장병들에게 제공하는 국방부에 감사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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