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 정말 어떡해야 하니
10년 만에 필름이 끊겼다.
대단히 술을 많이 마셨나? 와인 1병, 적은 양은 아니지만 ‘필름이 끊길 정도로’ 과음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문제는 내가 지난 한 달간 금주를 했다는 점이다. 평소에 잔잔바리로 한두 캔 느낌의 술을 즐겨왔던 나는 그런 습관을 버리고 싶었고 평소에는 마시지 않고 '한 달에 한 번 정도 양질의 술을 가볍게 먹는 방식'으로 바꿔보고 싶었다.
약 4주간의 금주, 그리고 우리 집에서 술 약속이 생겼다. 술자리를 함께한 부부는 정말 좋은 사람들이고, 몇 년간 종종 보며 꽤나 친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는 있는 그런 사이다. 한 달간 술을 안 먹었어서 내가 술이 약해져 있으리라는 걸 전혀 생각 못한 게 패착이었다. 남편도 나도. 남편은 우리가 호스트니까 아이들을 좀 돌보면서 초대한 부부가 좀 편하게 자리를 즐길 수 있도록 하려고 주로 아이들과 있었다.
나는 분명 초반에는 간단한 안주를 추가로 내오기도 하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다가 와인 ⅔ 이후부터 만취 상태로 접어든 거 같다. 혀가 꼬이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로부터 1시간 후 필름이 완전 끊긴 것으로 추정되고(남편 아이들 찍은 사진들 시간으로 추적하다 보니), 무려 약 3시간 동안 완전히 필름이 끊긴 상태, 그러니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상태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인 건, 대화의 주제가 초대한 부부와 나누기에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그러니까 만취하지 않았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얘기들이었다는 것(초대한 부부 와이프랑 다음 날 통화하다가 알게 됨). 나는 그 주제로는 남편 외에는 다른 누구와도 거의 대화를 나눈 적이 없는데, 아무튼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주제로 아주 신나게 떠든 것 같다.
그 주제 자체가, 그 일이 내게 어떠한 형태의 설명할 수 없는 울분으로 쌓여있기도 하여 아마도 다소 격앙된 상태로 말하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아무튼 사람 좋은 그녀의 말에 따르면 ‘언니~ 언니는 반복을 하더라고 반복ㅋㅋㅋㅋ’ 웃으며 말하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를 않으니 이걸 어쩌나.
서른 살에 한 번 이랬을 때는, 이 정도로 스스로가 싫진 않았다.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제 마흔인걸. 불혹이라며. 도대체 왜 이러냐. 새벽에 잠에서 깨어 변기를 붙잡고, 겨우 방으로 다시 돌아와 약간 탈수 증상까지는 아니지만 목이 너무 말랐으나 도저히 일어설 수가 없는 몸 상태여서 어쩔 수 없이 남편을 깨워 꿀물 좀 달라고 했다. 단물이 어찌나 당기던지. 이럴 때 혼자였으면 나 정말 큰일 났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그날 새벽부터 다음 날 6시까지 먹을 것도 제대로 못 먹고 계속 나 자신과의 무의미한 힘겨운 사투를 벌이다가 저녁이 되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술병이 나도 삼십 대 때와는 다르게 몸이 너무 힘들다. 회복 속도도 더디다. 나 자신 왜 이렇게 한심하냐고 욕이 나오다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기도 해서 혼자 껄껄 웃기도 하다가.. 거의 실성 수준이었다
전날 목청을 높이던 그 미친 여성은 나였을까? 누구보다 나였을지 모른다. 노필터. 검열 없는 나 자신. 나는 그게 두려운 것이다. 비슷한 경험이 있는 친구 s에게 이 얘기를 하니(그녀는 대리수치를 느끼면서도 박장대소했다) 이렇게 답했다.
"그냥 내 인간성을 믿어야지 뭐.. 내가 그렇게 최악은 아닐 거야 이러면서"
진정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명언이었다.
근데 친구야, 있잖아, 혹시라도 나의 인간성이 그렇게 최악이면 어쩌니. 술에 취해서 내 말만 하고 제발 쌓아온 내 울분을 들어줘 모드였다면?(확인 불가) 남편이 오며 가며 듣기로는 그냥 조용조용 무슨 얘기를 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상대방의 말보다는 내 말이 맞다고 우기는 중이었다면?(확인 불가) “아니~ 그게 아니고~~ 이렇다니까요 그 엑스엑스가 나쁜 놈이라니까?’ 이런 거였다면?(역시 확인 불가하지만 가능성 높음)
왜냐면 필름이 끊겼지만 그 만취->기억 상실 상태로 넘어가는 1시간 동안의 대화는 기억이 나고 그때는 나름 최소한의 필터를 거쳐 얘기를 한 것이었을 텐데 그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고 하니, 그러니까 같은 주제로 3시간을 더 말했는데 기억에 하나도 없으니 노필터로 얘기했을 모든 것들을 어쩌란 말이냐..
남편은 “그럼 뭐 어때~”라고 말했다. 아니 싫어 싫다고. 그 주제에 대해서 만큼은 내 생각이나 입장을 누군가에게 들키는 게 싫다고. 그래서 항상 말을 조심해 왔는데, 내 생각을 세상에나 기억조차 못하는 상태에서 말했다고 생각하니.. 기함할 노릇이다. 그냥 자지 그랬니 차라리.
하루종일 진짜 시간을 돌리고 싶은 마음과 나 자신을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생각을 오가다가 마지막에 드는 생각은 이랬다. 아니 근데 사실 그 모습도 내 모습이고(그렇다고 이런 방식으로 그 모습을 꼭 보여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지만), 그게 나인거면 뭐 어때,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미 엎질러진 물 돌이킬 수도 없지만, 그 모습도, 평소와는 조금(많이) 달랐을 내 모습이, 사실 내가 스스로 검열해 온 나의 원래 모습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친구가 말했듯 너무 억눌러 놓은 것이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엉뚱한 때 터져버린 것도 같다.
아직 더 있다. 남편의 증언에 따르면, 그러다 내가 테이블 위에 팍 엎드리며 잠들었는데, 옮겨서 침대에 눕히는데 그 와중에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더란다.
얼마나 속이 시원했으면 그랬니 이 여성아? 얼마나 속에 있던 말을 노필터로 탈탈 다 내뱉었으면 그렇게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잘 정도일까 나 자신? 남편이 그렇게 웃으며 잘 정도로 행복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했다. 그 3시간 동안 참 가지가지 했다. 이불킥이라는 표현을 너무 오랜만에 나 자신에게 적용해 봤다.
최근 몇 년 정말 아이 육아하며 뭐라고 해야 할까, 나만의 루틴들을 만들고, 상당히 정돈된, 정제된 일상을 살다가 갑자기 한방에 튀어나온 나의 거친 본성은..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본성이었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은 아니고 매서웠을 눈빛과 그걸 지켜보던 정말 사람 좋은 부부.. 특히 남편 쪽은 나를 '누구누구 엄마'로 처음 봤었고 그런 모습만 쭉 봤었기 때문에 자연인인 나의 모습에 적잖이 놀라셨을 거다. 무엇보다 초대해 놓고 필름 끊겨서 배웅도 못하고, 만취 시점 이후부터는 준비한 안주도 당연히 챙기지 못했고..
휴 땅굴을 최대한 깊이 파서 들어가고 싶다. 진짜 내가 술을 아예 끊어야지, 이러고도 마시면 성을 ‘견'으로 진짜 바꿔야 한다. 내게 한 달에 한 번 정도 양질의 술을 즐기는 건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안 먹다 먹으면 술이 너무 달고 한 잔으로 끝내기 어렵다. 양질의 술이면 더더욱. 그리고 빨리 취한다.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정신 좀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는 헛헛한 그 느낌. 마흔 넘어서도 이럴 줄은 몰랐다. 당초 계획이라면 장도 봐서 내일 먹을 음식도 준비해 놓으려고 했는데, 집에 계란조차 없다. 그래도 저녁에 아이에게 냉동실에 있던 고등어를 꺼내서 구워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그래도 일과를 하나는 챙긴 느낌. 아이가 밥 두 그릇과 함께 고등어를 너무 맛있게 먹어서 고마웠다. 네 살 아이가 저녁에 병원 놀이를 하다가 말했다. "엄마, 술을 많이 마시면 안 돼~ 그럼 아프잖아". 그러게 말이야 얘야.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 실수를 무릅쓰고 또 살아가야 한다. 그렇기는 한데 그 부부한테 또 놀러 오라는 얘기를 할 자신은 도저히 없다. 너무 부끄러워.. 정말 혹시라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방귀 튼 사이가 되기라도 한 건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계속 들 때는,,, 자꾸 세뇌해야 한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 난 완벽하지 않다. 이미 지난 일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에게 관심 없다.
그러다 완전히 몰입해서 봤었던 <나의 아저씨> 명대사가 떠올랐다. 급히 찾아봤다. 정말 대사 기가 막히다. 이 작품을 쓰신 작가님께 손잡고 아이고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전하고 싶은 정도다.
“인간 다 뒤에서 욕해. 친하다고 욕 안 하는 줄 알아? 인간이 그렇게 한 겹이야? 나도 뒤에서 남 욕해. 욕하면 욕하는 거지 뭐 어쩌라고. 뭐 어쩌라고 일러. 쪽 팔리게"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하고.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인간은 그렇게 한 겹이 아니고, 여러 겹이다. 나도 그렇다. 그 여러 겹을 '인정'하자. 내가 싫어하는 내 모습도 그저 나 자신이고, 사람은 모두 다 그렇다는 걸.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옛 일은 잊고, 실수에 굴하지 않고, 오늘 하루는 다시 기운 차려서 잘 보내 보고 싶다. 나의 소중한 오늘 하루를 더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엇보다 연말이다, 절대 금주 지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