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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고래시간 Aug 24. 2021

사람은 되지 못하더라도 좀비는 되지 말자

"사실 내가 좀비였어"

예전에 [다세포소녀]라는 영화가 있었다. 주인공 소녀는 자신에게만 보이는 ‘가난’이라는 인형을 항상 등에 매달고 다녔다. 장르는 코미디였고, 원작이 만화라서 굉장히 판타지하고 이색적인 영화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웃을 때 난 혼자서 내내 울었다. 

지오디의 노래처럼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부모님은 맞벌이를 해서 겨우 먹고살았다. 난 초등학교 어린 나이 때부터 두 동생의 끼니와 일상과 학교 숙제까지 챙겨야 하는 가장 아닌, 소녀 가장이었다. 가끔 친구들과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면 농담처럼 “넌 무슨 보릿고개 시절에 살았었냐?”라는 소리를 듣는다. 풀뿌리를 먹고살지는 않았지만, 풀뿌리처럼 질기고 거친 가난의 공포와 불안을 매일 먹으며 자랐다. 

그래서 나는 사춘기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사춘기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누구보다 오춘기를 더 거세게, 오랫동안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춘기라고? 눈부신 청춘? 어이가 없네~

어린 시절, 사춘기로 몸살을 앓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난 유치하고 사치스러운 감정이라고 생각했다. 대학교에 갔을 때는 눈부신 20대라고??? 쓸데없는 소리! 눈부신 청춘이라고 다들 부러워하는 20대 때, 난 “눈부신”이 아니라 “눈 부은”, 툭하면 눈물 질질 짜는 청승맞기 그지없는 20대였다. 내 머리 위에는 항상 먹구름과 비가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나의 청춘은 빛나지도, 희망적이지도 않았다. 막막했고 답답했고 우울했다. 내 등에는 줄곧 가난에 더해, 불행에 더해, 우울과 불안과 죽음이 올라탔다. 아무리 내려놓으려고 해 봐도 어느 순간 ‘폴짝’ 너무도 가볍게 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 놈들 때문에 나는 자꾸 무거워져서 조금씩 등이 구부정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다 가는 언젠가는 길을 걷다가 고꾸라져서 코가 깨질 것만 같았다. 


좀비가 나타났다! 

무겁고, 무서웠던 20대를 겨우 버티고 서른 살이 되었을 때 내 주변은 온통 좀비들뿐이었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일과 돈을 주는 누구도 모두 좀비가 되어 나의 살점을, 나의 피를 야금야금 먹어댔다. 당시에 난 그렇게 느꼈다. 내가 숨 쉬고 살아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은 나의 마지막 남은 살점까지 먹어 치울 것만 같았다. 


어느 날은 가족들과 밥을 먹는데 음식 씹는 소리조차 소름이 돋아 같이 밥을 먹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날 나는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사람들 많은 홍대 길바닥에 주저 않아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 나의 선택은 그냥 빨리 죽거나 좀비들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내가 갈 수 있는 최대한 멀리. 

내 몸보다 더 크고 무거운 배낭을 메고 홀로 비행기를 타고 아무도 모르는 먼, 먼 나라로 도망쳤다. 오로지 좀비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난 탈출에 성공했다! 

그제야 조금씩 숨이 쉬어졌다. 사춘기 소녀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든지 유치하고 가벼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로소 나는 온전하게 오춘기를 맞을 준비가 되었다…,

…고 생각했다. 그런 줄 알았다. 이제는 한껏 홀가분해진 줄 알았다. 앞으로는 조금 다르게, 나를 위해 살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안고 예정보다 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불안과 우울이라는 녀석들이 다시 나의 등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내가 툴툴 털어 내버려도 금세 등 뒤에 올라타서 비웃고 있었다. 이제는 불안과 우울이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좀비처럼. 몇 년을 좀비들과 싸우다 지친 나는 결국 또 배낭을 짊어 메고 도망쳤다. 그렇게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계속 도망을 다녔다. 하지만 모든 게 헛수고였다. 이쯤이면 됐다고 마음먹고 현실로 돌아오면 여전히 좀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사실, 내가 좀비였어.

끝없이 나를 괴롭히고 갉아먹은 것은 사실은 주변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것을. 내가 바로 나의 내장부터 뇌까지 쪽쪽 빨아먹으며 괴롭혔던 좀비였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고, 사랑하지 못했으며, 보듬어주지도 못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어린 시절의 가난을 등 뒤에 꽁꽁 묶고 풀어주지 못한 것도 바로 나였다. 무조건 참으라고, 희생하라고, 울지 말고 버티라고 다그친 것도 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괜찮다고 위로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괜찮다고 하지 못하는 것도 오로지 나뿐이었다. 

내가 바로 그렇게 도망치고 싶어 했던 끔찍한 좀비였다. 그러니 아무리 먼 곳으로 도망을 간들 아무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좀비의 실체를 알고 난 후, 좀비로부터 제대로 도망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들을 찾아다녔다. 나를 위한 선물도 주고, 마음공부도 하고, 잘 못해도 괜찮다고, 미움받아도 괜찮다고 수시로 세뇌도 했다. 

그리고 제대로 오춘기를 겪겠다고 마음 먹었다. 아프다고, 괴롭다고, 힘들다고, 소리도 지르고 화도 내면서 내 안에 숨어 있는 좀비들을 하나씩 꺼내서 햇빛에 말려 사라지게 하고 있다. 

사춘기 때 하지 못했던 철딱서니 없는 행동도 하고, 무모해 보이는 희망도 품어보고, 어른들에게는 쓸데없어 보이는 도전도 해본다. 어이없이 웃어도 보고 춤도 춰본다. 불편한 사람은 멀리할 것이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거침없이 손을 잡을 것이다. 

나의 뒤늦은 사춘기가, 천방지축 오춘기가 내 안의 좀비들을 물리쳐줄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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