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공연장에서 만난 유럽여자들의 멋내기
클래식 공연장에 멋 내고 오는 여자들을 좋아한다. 더 정확히는 공연장 로비의 관객을 보며 그녀들의 작은 이야기를 상상하기를 좋아한다.
'사놓고 차마 회사에는 입고 가지 못한 원피스를 오늘 개시했네. 나도 그런 옷 있지.'
(화려한 플라워 패턴에 롱 레이스 드레스를 입은 아가씨를 보며)
'평생 후원회원 느낌이셔. 아마 20년 이상은 저 목걸이와 함께 시향 정기공연에 오셨겠지.'
(광이 좋은 진주 귀걸이와 목걸이 세트를 한 은발 관객을 보며. but 피부에서 나오는 산 때문에 진주는 아주 오랜 세월 한 가지만 착용하기는 힘들다.)
이런 식이다. 특별한 날, 특별한 곳이니까, 그날의 공연 컨셉에 맞춰 자기만의 작은 축제를 즐기는 여자들. 아마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부터 설렜을 그 시간이 눈에 선히 그려지는 것이, 참 사랑스럽다. 말하자면 레드카펫 구경 같은 건데, 이게 록 페스티벌 패션을 구경하는 재미보다 덜하지 않다. 물론 공연시간 맞춰 퇴근 후 헐레벌떡 뛰어왔을 평일 공연보다 맘먹고 한껏 멋 낸 주말 공연이 눈이 훨씬 즐거운 건 당연하다.
작년 6월, 유럽으로 떠난 여행에서도 공연장 관객 관찰은 꽤나 큰 즐거움이었다. 도시를 여행하는 방법으로 공연 보기를 즐기는 난 이 달에 유독 신에게 예쁨 받은 기분이었다. 취케팅까지 도전하여 원하는 티켓은 모두 GET! 도시별로 체류기간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암스테르담에서 베를린 필, 프라하에서 체코 필, 비엔나에서 빈필과 러시아 성악가들의 오페라 콘서트 <오네긴>, 마지막으로 로마에서 오페라 <라보엠> 이렇게 배불리 공연을 볼 수 있었다. 클래식 음악의 특성상 중장년 관객이 많지만 그래도 그 나라, 그 도시 관객의 스타일을 맛보기에는 충분했다.
암스테르담은 역시 '벨벳의 현, 황금의 관'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수준 높은 악단,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를 보유한 도시다웠다. 마침 2002년부터 베를린 필을 지휘한 사이먼 래틀 경의 아듀 공연이라 객석은 만석이었고, 모두들 남보다 한발 빨리 예매에 열을 올렸을 진성 클래식 팬들이었다.
아, 암스테르담, 늘 돈이 운하의 물처럼 풍족히 흐르던 상인의 도시여. 돈이 잘 도는 곳에 자연히 예술도 활짝 꽃핀다. 자유로운 시민사회 역사가 긴 도시인만큼 과시적이진 않지만 생활 속에서 예술을 향유하는 은은한 여유는 여자들의 옷차림에도 배어있었다. 갔던 어느 공연장보다 절제된 세련미, 고급스러운 소재감, 적절한 액세서리를 매치하는 센스가 모두에게 엿보였다. 한마디로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스타일.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패션 컨셉은 심플 & 모던이고, 일단 모델들의 피지컬 자체가 우월하다.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 키는 183cm 정도로 전 세계에서 가장 크다. 게르만족 계열 유전자에 유산소 운동인 자전거를 많이 타는 나라이니 중년 남성이어도 배가 없다!
잠깐, 여성 관객 얘기였지? 다시 암스테르담 여자들의 패션을 묘사하자면 그녀들도 큰 키에 질 좋은 리넨 셔츠를 입고 컬러풀한 스카프나 화려한 패턴의 스커트로 포인트를 준 패션이 많았다.
로마의 오페라 관객들은 이태리 남자들이 그렇듯 대놓고 '그래 나 멋 냈다' 싶게 내고 화장도 '씨게' 하는 스타일리시한 여자들이었다. 공연장 투어 중 유일하게 스모키 아이를 본 것 같다. 흡연 장면을 본 것도 가장 짙은 향수 냄새를 맡은 것도 로마의 공연장에서였다. 나처럼 여행객인 관객도 많아 도시 토박이의 평균 패션을 말하긴 좀 어렵지만, 할머니여도 과감한 헤어밴드를 한다든지 남들의 시선에 제약을 받기보다 오히려 시선을 즐기는 멋내기 리듬이 경쾌했다. 또한 리틀 블랙 드레스, LBD는 여기서도 유효했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정기공연이어서 그랬을까. 빈필이 밖에서나 빈필이지 여기서야 빅 이벤트가 아닌 비엔나 여성들은 너무나 일상적인 모습으로 단정히 입었다.
비엔나가 그 옛날 모차르트가 돈을 벌던 도시라면 돈을 쓰러 가던 또 다른 클래식의 도시, 프라하의 여인들 역시 있는 옷 중 가장 예쁜 드레스를 입은 듯한 소박한 드레스업이었다. 간혹 튀는 언니들이 있지만 대체로는 우리 엄마 패션, 이모 패션 또는 고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패션과 오버랩되었다. 아마도 꽤 오랜 시간 이 관람 루틴을 즐겨왔음이 느껴지는 차림이었다.
예외적인 풍경도 있었다. 세상 투머치, 투머치! 비엔나 콘체르트하우스에 오페라 콘서트 <오네긴>을 보러 온 러시아 여인들. 자라 매장을 통째로 털어온 듯, 컬러는 알록달록에 소재는 시퀸에 프릴에 레이스에 골고루, 프린트는 빅 플라워 패턴에 과감하고 직설적인 멋의 끝판이었다. 러시아 지휘자 유리 바슈메트가 이끄는 오케스트라에 볼쇼이 극장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이 노래하는 차이콥스키의 오페라 <오네긴>이다 보니 이건 비엔나의 공연으로 보기보다는 모스크바의 공연으로 보는 게 맞았다. 관객 중 유일하게 나만이 비러시아인이었을 정도니. 모스크바 야외공연 유튜브 영상에서 숱하게 봤던 알록달록한 루스키들이 여기 다 있었다. 그리고, SNS 인증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사진 찍고, 인스타 스토리 찍고, 공연 중에도 플래시를 터뜨리는 비매너까지. 물론 원래는 빵 사 먹을 돈을 아껴 클래식 공연을 보는 러시아인들이니 이날은 여행객의 들뜬 기분으로 이해했다.
이쯤에서 예당(예술의 전당) 룩이 생각나는데, 우리도 좀 더 멋을 냈으면 좋겠다. 내 돈 주고 클래식 공연을 본지 이제 10년쯤 되었다. 처음에는 회사 근처의 공연장부터 가기 시작했다가 이제는 연말에 서울시향의 다음 해 공연을 선예매할 때 일 년 치 공연을 예매해두기도 하고, 예당 유료회원으로 가입해있는 수준의 아마추어 애호가다. 그런데 10년간 공연장을 오간 사이, 관객들의 패션은 그다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언젠가는 '2030 여자들의 공연장 패션'이라는 기사 취재로 공연장마다 갔다가 허탕을 치고 기획 아이템이 취소된 적도 있었다. 왜? 기획의도처럼 공연장 패션이 특별한 관객이 전혀 없었으니까. 그나마 케이블 채널에서 댄스와 오페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화제가 되고 젊은 팬이 유입되면서 클래식 공연장 로비도 많이 경쾌해진 것 같다(경험 상, 서울은 발레 관객들이 가장 드레시하고 우아한 패션이다. 오페라글라스와 장갑을 챙겨 오는 열성 발레 팬을 본 적도 있다. 그냥 '나'피셜임).
패션은 TPO만 신경 써도 중간 이상이다. 일상에서 즐기는 소소한 이벤트 날, 이 작은 레드카펫을 좀 더 자유롭게 즐겼으면 좋겠다. 어머니 관객들은 그저 흑백 모노톤의 구호 스타일, 겨울엔 그저 모피 이런 게 아니라 다양한 멋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게다가 모피는 공연장의 소리를 흡수하기 때문에 보관소에 맡겨놓고 입장하는 게 좋다).
삶을 즐기고 자신의 취향과 여성성을 마음껏 드러내는 멋내기. 그런 장면을 한국에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이런 내 이야기에 파리와 도쿄에 산 경험이 있는 공연기획자 언니는
“우리 세대가 빼박 중년 정도가 되는 시점 즈음부터는 아마도 그런 다양성을 볼 수 있을 거 같아.”
라고 했다. 음... 그럼 나부터고 이제부터네.
물론, 앞서 얘기한 도시들도 짧은 관람으로 관찰한 것이다. 그리고 오페라와 그보다 캐주얼한 오페레타의 드레스코드도 구분해서 입을 정도라는 베를린 시민과 원조 시민사회 암스테르담이 낳은 뉴암스테르담, 뉴욕 여인들의 패션은 관찰할 기회도 없었지만 늘 서울의 공연장들에서 느끼던 아쉬움이다.
사실 드레스코드가 별건가? 맥주 한 잔을 마셔도 기네스는 기네스 잔에 따라 마시고 하이네켄은 하이네켄 잔에 따라 마시면 더 맛있는 것을. 기다리던 쇼를 보러 가는 날, 상황에 한 걸음 깊이 들어가 ’내 인생의 여배우는 나’라는 마음으로 레드카펫 걷는 듯 기분을 내면 공연도 일상도 한층 맛이 풍부해지는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