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대하는 바람직한 자세
하루키가 그랬다. 나이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태도는 되도록 그걸 의식하지 않는 거라고.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애써 자신을 아저씨나 아줌마로 만들 필요도 없다. 나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이 말을 가슴에 담고 사는 나는, 지난 열흘 간 생일이라고 집으로 친구들을 부르거나 못 보던 이들을 만났다. 요리하는 걸 좋아하니까 집에서 네 번 정도 상을 차린 것 같다. 엄마와 동생은 나이 들어 유난이라고 한 마디씩 했다. ‘아니 아직도 그런 걸 챙기냐’는 식.
몇 년 전부터 생일 즈음이면 기분이 묘해져서 일부러 외국 여행을 잡아서 낯선 곳에서 생일을 맞곤 했다. 세 번의 생일을 그렇게 낯선 도시에서 해방감을 맞으며 보냈다. 그러면 나이가 피해 가기라도 할 줄 알고. 그렇지만 피해 갈 리가 없지. 그걸 아는 이제는 좀 덤덤히 맞게 된 편이다.
사실 좋아한다. 생일이라는 핑계로 좋아하고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 말도 하고 밥도 먹으며 서로 다 아는 일상,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술잔 기울이고 눈 마주치며 함께 나누는 시간. 나이테가 동그랗게 하나 늘어난다고 그 동심원 안에 있는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일은 따숩다.
어찌 보면 나이 먹는 것 정도가 신경이 쓰인다는 건 별일 없이 잘 산다는 증거다. 미혼인 여자들은 서른 다섯 전후로 왠지 모를 조바심에 원래의 자신답지 않은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나 행동을 하는 일이 많다. 일도 이제 할만할 때고 경제력도 생겨서 취미 생활도 한껏 즐길 수 있는 때인데도 말이다. 납득 안 가는 연애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거나 그다지 교감하지 못한 상대와 그저 ‘해야 하니까’ 하는 결혼을 선택하거나, 그도 아니면 충분한 검토 없이 덜컥 부동산 쇼핑이라도 하거나. 내가 그랬기 때문에 잘 아는 이야기다. 점심시간에 나가서 일생 가본 적도 없는 동네의 신규 오피스텔을 덜컥 계약하고 들어왔다. 일찌감치부터 기혼에 모두의 카운슬러인 현명대장 선배가 “잘했어. 니 나이엔 남편이나 집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하는거야.”라고 격려해줘서 그래도 조금 안도했지만.
"여자로서의 매력이 이제부터는 떨어지는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하고 너무 힘들었어요." 이 불안의 나이 변곡점에 소개팅 앱을 비롯한 온갖 경로로 남자를 소개받으며, 상대에 집착하고, 그걸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너무 도배하듯 털어놔서 모두를 지치게 했던 친구. 올해 마흔을 맞았는데, 며칠 전 그녀에게 감동받고 말았다. “암 판정을 받은 이후가 이전보다 훨씬 행복해요.” 그 이후 자궁암 초기임을 알게 된 것이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얼마나 무섭고 외로웠을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삶의 우선순위가 건강이라는 가치로 명확해졌다. 그런 지금이, 세상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갈증 나는 소금물만 가득 마시며 헤엄치던 그때보다 낫다는 걸로 보였다. 치료 때문에 소모적인 만남이 정리되고, 금주는 당연하고 직접 해독주스를 갈아 마시고 건강식을 하면서 자연히 일상도 단정하고 건강해졌다. 그리고 이것 또한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이니까 콘텐츠를 잘 정리해 비슷한 상황인 사람들에게 공유할 예정이라고 했다. 빛이 났다. 이 이야기를 하는 그녀는 너무 아름다웠다. 원래도 미인이지만 단순한 예쁨이 아닌 다른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하루키는 나이에 대해 에세이에서 말한 내용이 꽤 많다. 가급적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좋다는 자기 말에 반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나이를 먹어서 좋을 일은 별로 없다고 생각하지만, 젊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거나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건 기쁜 일입니다. 한 걸음 뒤에로 물러서면서 전보다 전체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혹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면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디테일에 불현듯 눈뜨게 됩니다. 그게 나이를 먹어가는 기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경험은 인생에서 하나를 얻은 것 같은 흐뭇함에 젖어들게 합니다. 물론 반대로 젊은 때만 이해할 수 있는 음악이나 문학에도 있지만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나이 먹는 것을 여러 가지를 잃어가는 과정으로 보는가, 혹은 여러 가지를 쌓아가는 과정으로 보는가에 따라 인생의 퀄리티는 한참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뭔가 좀 건방진 소리 같지만.”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유럽의 중세미술을 보면 예술가들은 노파를 매우 추하고 음험한 존재로 묘사했다. 수많은 그림에서 젊은 여인은 우윳빛 살결에 빛나는 미의 상징으로 그리는 반면, 노파는 마치 천벌이라도 받아 쭈글쭈글해진 양 추악하게 그려 혐오를 숨기지 않았다. 노파는 마녀와 동급이었다. 인문학자 에라스무스는 <우신예찬>에서 어리석고 추악한 여러 유형의 인간상 중, '거울 앞에서 떠날 줄을 모르며, 아직도 교태를 부리려고 하고, 볼품없는 가슴을 서슴없이 드러내는 미치광이 노파'를 말했다. 베르디의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에서는 한 스페인 백작이 집시 노파가 자신의 아이를 쳐다본 이후로 아프기 시작하자, 노파가 저주를 걸었다며 화형시킨다. 동화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백설공주를 시기해 독이 든 사과를 준 여왕은 노파로 둔갑해 문을 두드렸고, 인어공주에게 인간이 되는 대신 목소리를 잃는 약을 준 것은 제대로 된 인간도 아닌 하반신이 문어인 아줌마 마녀('디즈니 애니메이션' 버전)다. 뺑덕어멈, 팥쥐 엄마… 말을 말자.
하루키 말마따나 젊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을 더 보게 되고 알게 된 여성은 남성의 입장에선 어렵거나 성가신 존재일 거다. 가끔은 위협적이기도 하고. 남성이라는 타자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림 속의 노파는 그런 것이다. 명작 속의 노파를 이런 각도로 보게 된 것은 나 역시 뭘 좀 알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든 살까지 산다고 가정했을 때 반 정도 온 지금의 나로서는, 나이 들어감에 따라 ‘분수와 염치는 알아야 하지만 철은 안 들어도 된다’ 고 생각한다. 분수와 염치를 모르면 그건 좀 곤란하다. 민폐가 되거나 조롱거리가 되거나 꼰대가 되거나 셋 중 하나인데 뭐하나 좋을 게 없다. 반대로 분수와 염치를 알고 철이 안 들었으면 그게 바로 자유로움 아닐까. 한국 나이로 올해 70세가 된 하루키가 여전히 젊은 세대에 공감받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엄마와 둘이서 크루즈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아시아 투어라 배 안은 대체로 중국인, 인도인, 일본인, 한국인 중노년 부부들이었다. 뜻하지 않게 아시아 각국 시니어들과 함께한 여행인데, 어라?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거다. 팝 명곡 콘서트나 LED댄스도 나쁘지 않았고 덱체어에서 책 읽는 것도 국적이 다양한 승객들의 수영장 이용과 식사 매너, 패션을 관찰하는 것도 나름 흥미로웠다(갈라 디너 패션에 있어선 일본인이 가장 TPO에 충실한 모범생이었다). 나중에는 좀 질리긴 했지만 엄마와 그렇게 여러 끼니를 양식 메뉴로 먹은 것도 이색적인 경험이었다. 그때가 아니면 엄마가 비프 부르기뇽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거다. 엄마도 여자였다. “갈라 디너 옷은 따로 챙겨 와야 해.”라는 내 말에 진주 목걸이와 가진 옷 중 가장 격식 있는 원피스를 가져와 매무새를 다듬던 엄마는 내 마음속에 사진처럼 찍혀있다.
무엇보다 시니어들이 많기 때문에 배 위의 시간은 천천히 간다. 일정에 서두름이 없다. 시간표를 보고 주어진 프로그램 몇 가지 중에 선택해서 즐기면 되고, 기항지에 도착해도 관심 없으면 안 내리고 크루즈 안에서 초밥에 삿포로 맥주나 한 잔 마셔도 된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경제적인 준비를 해놓는다면) 생각보다 노년 생활이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공부에서 자유로워지는 길은 공부를 잘하는 것이듯, 나이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나이를 잘 드는 것 아닐까.’
전생에 개구리였는지 매년 경칩 즈음한 생일쯤에나 정신이 들곤 한다. 과거는 모르겠고 지금부터라도 잘 나이 들자고 다짐했다. 청춘은 지났지만 할머니는 아직 멀었으니까. 그리고 난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