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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Mar 15. 2019

엄마, 보고 싶어

- 오뚝이 주걱이 건네는 말


아침에 눈뜨자마자 커피 생각이 났어요. 주전자를 집어 들다 주걱을 건드리니 휘청이다가 제자리에 오뚝 서네요. 엄마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주고 간 그 주걱이요. 그 날 엄마는 참 낯설었어요.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서둘었죠. 내가 하겠다는데도 굳이 매실 건더기를 건지고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엑기스를 줄줄 흘리고... 왜 엄한 일을 만드냐고 짜증을 내며 걸레질을 했지요. 그날 엄마는 <족한 사랑>, <말 3분이면 세상을 바꾼다> 등 몇 권의 책과 천연 삼베 이불, 그리고 어디서 사은품으로 받았는지 오뚝이 주걱을 들고 왔어요.      

짜증이 잔뜩 올라온 나를 식탁에 앉히고 엄마는 말을 꺼냈죠. 머릿속이 뿌연 게 기억이 잘 안 나요. 대략 엄마가 많이 아파서 오래 못 살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 같았지요. 뭔 소리야? 위가 안 좋아서 밥을 잘 못 먹고 야윈 것뿐이잖아. 위염이야 몇십 년 전부터 달고 살아온 거고. 그게 무슨 죽을 일이라고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우리 엄마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엄마가 무슨 말을 더 하려 했지만 막았어요. 부정했지만, 알 수 없는 불안이 올라오고 있었나 봐요. 그래서 더 짜증이 났어.       


몇 주 후에 엄마는 가족들을 불러놓고 공식 선언을 했죠. 당신이 암 말기인데 1)수술 안 하고 2)중환자실 안 가고 3)연명치료 안 하겠다고.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 끝내고 담담하게 말했어요. ‘암 말기’라는 팩트를 처음 접한 나는 여전히 ‘말도 안 돼’를 반복했죠. 동네 2차 병원에서 간암 또는 담낭암 소견이 있다고 얘기한 것뿐이잖아. 종합병원에서 확진을 받은 것도 아닌데, 엄마 대체 왜 이래. 세 가지 약속 꼭 지킬 테니 큰 병원에 가자고 간곡하게 부탁했어요. 엄마는 마지못해 생각해 보겠다고 했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만...     


어버이날을 앞두고 아빠, 엄마, 외숙모 함께 황산도에 갔던 거 기억나요? 생선도 싱싱하고 가성비가 좋아서 자주 갔던 곳이잖아. 그때가 엄마랑 마지막 외출이었네. 엄마는 그 좋아하는 생선도 못 먹고 산책도 못하고 힘없이 벤치에 앉았어요. 분위기 좀 띄우려고 애써 명랑한 척 사진을 찍었을 때도 엄마는 웃지 않았어. 여느 때 같으면 활짝 웃어줬을 텐데. 그때 엄마는 하나님이 암을 고치고 생명을 연장시켜 줄 거라 믿고 기도했지만, 안색은 날로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새벽에 아빠 전화를 받고 김포 우리 병원 응급실로 뛰어간 게 7월 중순쯤이었나? 일주일 후 퇴원할 때 조선족 간병인 아줌마도 함께 집으로 왔잖아요. 아줌마가 맘에 든다고, 집에서 같이 지내고 싶다고 했죠. 이생의 마지막 두 달 동안 엄마 곁을 지킨 사람은 생면부지 고용인이었네요. 간병 아줌마는 반찬도 만들고 집안 청소도 하고 엄마랑 TV를 보며 도란도란 얘기도 나눴지요. 귀 어둡고 색시 챙길 줄 모르는 아빠보다 그 아줌마가 더 의지가 됐을 거야. 마지막에 엄마가 시계랑 반지를 모두 빼준 걸 보면...      





엄마 떠나기 2주 전쯤  ‘엄마의 죽음’이라는 현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였어요. 큰 딸처럼 엄마를 살뜰히 챙기던 서정연 집사님과 길게 통화하던 밤에요. 집사님이 매주 엄마 모시고 사우나 가고 물리치료도 가고 가족 같이 지냈잖아요. 모닝 승용차에 엄마를 태우고 강화, 부평, 건대, 잠실 등지로 종횡무진 참 잘도 다녔어. 엄마가 회장으로, 집사님이 총무로 <송암선교장학회>를 이끌며 바울과 바나바처럼 같이 선교를 했잖아요. 그 밤에 집사님이 말했어요. 얼마 못 사실 것 같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평소에 얌전한 분이 그리 말하니 죽음이 성큼성큼 차고 들어왔어요. 거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을 했지요. '우리 엄마 살려 주실 거죠?' 반신반의했던 기도가 그날 딱 끊겼어요. 비로소 엄마를 편히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9월 둘째 주 토요일. 엄마랑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 마지막 날이에요.     

삼성레포츠센터에서 딸내미 발레 수업을 마치고 교촌치킨 네 박스를 사들고 병원에 갔죠. 작은 올케가 조카 셋을 데리고 와서 병실 환자들, 보호자들하고 같이 치킨을 나눠 먹었어요. 소풍이라도 나온 것처럼 모처럼 즐거웠지요. 엄마는 기운이 없었지만 흐뭇한 미소로 닭다리 뜯는 손자들을 바라봤어요. ‘잘 먹을게요’하는 환우 가족들의 인사도 흐뭇하게 받았고요. 그날 엄마는 ‘아침 빛 같이 당당하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였어요. 엄마가 자주 암송하던 잠언 구절처럼.      


이틀 후 병원 가는 길에 작은 올케 전화를 받았어요. 고통이 심한데 통증 주사를 놓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다 하니 어찌해야 하냐며 울먹였어요. ‘위독하다’는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어요. 가족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엄마에게 물었지요. “엄마, 통증 주사 놓으면 생명에 지장이 있을 수 있대요. 좀 참아볼래요 아님 주사 놔 드릴까?” 코에 호스를 끼고 거칠게 호흡하던 엄마는 가까스로 “주사...”라고 말했어요. 간호사실로 뛰어가 주사 놔 달라 말하고 엄마의 손발을 주무르며 두 가지 셀프 유언을 했어요. 1)엄마가 평생 기도하며 세운 <송암선교장학회> 계속 이어가겠다 2)아직 신앙이 없는 우리 남편, 예수 잘 믿는 장로 만들겠다고. 엄마 어땠어? 엄마가 듣고 싶었던 말이었나요?      


통증 주사를 맞고 새근새근 잠든 엄마를 보고 왔는데,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반듯이 누워있는 엄마 뺨에 입을 맞추고 영정 사진을 뽑고 백합과 국화를 섞어 꽃을 주문했죠. 검은색 상복이 들어오고 조문객을 위한 상차림 메뉴도 선택하고. 시신 기증 서약을 한 터라 장례를 바로 치르는 게 아니어서 준비할 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뭔가 빠진 것 같았어요. 결혼식이나 돌잔치에는 주인공을 소개하는 영상이나 사진 같은 콘텐츠가 있는데 한 사람의 생을 마감하는 장례식에는 왜 그런 게 없을까? 78년 엄마 인생에 대한 기록조차 없이 떠나보내야 하는 건지... 텅 빈 무대처럼 허무하더라고요. 최근에는 <기억의 책>이라고 무덤 대신 그 사람에 대한 책을 만들어서 기억하자는 프로젝트가 생겼어요. 죽기 전에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전 장례식’을 한 사람도 있다던데. 그런 걸 미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오뚝이 주걱을 볼 때마다 엄마 생각이 나요. 주방에서 매일 쓰는 물건이니 매일 엄마 생각을 하는 거죠. 5년이 지났는데 아직 추모 기간이  안 끝났어요. ‘너는 다 좋은데 너무 까다로워, 좀 더 너그러워져라’고 엄마가 말했는데 이제 남편한테 그 소리를 들어요. 오십 쯤 되면 세상을 넉넉히 품을 줄 알았는데, 인생을 잘못 살았나 싶어요. 게다가 평생 기도로 키운 당신 딸이 예배도 온라인으로 떼우고 십일조랑 선교헌금도 다 끊고 냉담 중이예요. 셀프 유언 두 가지를 지키기는커녕 넘어져 몸져누운 꼴이랍니다.


이 과정을 언제 끝내고 엄마를 편히 보낼 수 있을까?

많이 미안하고 보고 싶어요.

엄마가 그리워요.                



엄마는 딸 손에 자기 죽음을 쥐여주고 떠난다고 해.
딸은 그 한 줌을 팔아 자기 삶에 큼직한 창문을 달지.
   - 김소연 詩 ‘경대와 창문’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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