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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니아 Sep 06. 2019

원조 혼밥러의 자기 성찰

- 선배들이 왜 나한테 냉랭한 걸까?

유시민 작가가 필독을 권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기 시작했다. Mill은 머리말에서 시민의 자유와 사회적 자유를 중심 주체로 삼고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고 밝힌다. 개인의 자유를 속박당한 경험은 선뜻 떠오르지 않지만 이 문장에 눈이 멈췄다.


관습은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행동 규칙의 타당성을 전혀 의심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관습은 이성적인 토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인식 때문에 이런 속성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p. 29) 



직장생활을 하면서 ‘관습’의 높은 벽 앞에 숨이 헉 막혔던 순간이 떠오른다. 20년 전 내가 근무하는 방송사는 미주 지역 신규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남미 진출의 파이오니어’가 되고 싶어 글로벌마케팅팀으로 부서를 옮기고 스페인어 전공이라고 셀프 홍보를 하고 다녔다. 녹슨 언어를 되살리기 위해 퇴근 후 학원을 다니며 라틴 아메리카로 뛰쳐나갈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웬걸! 아무도 나에게 중남미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팀장은 나에게 마케팅 경험이 없으니 내부에서 뉴스레터를 만들라고 했다. 채널 론칭은 코앞인데 플랫폼 계약이 전혀 안 돼 걱정을 하면서도 시장조사조차 시키지 않았다. 스페인어를 전공한 남자 직원이 있었다면 과연 이랬을까?


입술을 물어뜯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갑작스레 중남미 개척 명령을 받은 K부장이 내 손을 꽉 붙들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 달 만에 뚝딱 준비해 파나마 출장을 갔다. ‘중남미 10개국 케이블TV 10만 가구 전송 계약’이라는 성과를 들고 돌아와 간부회의에서 보고를 하고 박수를 받았다. 출장 떠나기 전날 ‘일주일 동안 남편 밥은 어떡하나?’ 고 묻던 본부장도 열심히 박수를 쳤다.


삼 남매의 외동딸로 자라며 ‘여자라서 안 돼’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남녀차별을 전혀 모르고 살다가 유리벽에 부딪혔을 때 처음 느낀 감정은 억울함이었다.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게 분했다. ‘성과로 보여주겠어!’. 오기가 생기고 빠드득 ‘이빨과 칼’을 동시에 갈다 보면 기회는 오게 마련이지만, 그때 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여자 선배가 없었다. 남자 선배 하고도 얘기 나눠볼 생각을 못했다. 


내가 이 사회의 비주류라는 것을 처음 인식하고 뼈아팠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제기하고 풀어가야 할지 몰랐다. ‘독립적인 삶’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었고 함께 고민을 나누고 상호작용하는 것은 서툴렀다. 그때 선배 하나 붙잡고 술 한 잔 사달라며 답답한 심정을 하소연할걸 그랬나 보다. ‘왜 나는 안 되는 건데?’하며 땡강이라도 부릴걸...








정치 영역에서 ‘다수의 횡보’(tyranny of the majority)’는 온 사회가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는 큰 해악 가운데 하나로 분명히 인식되고 있다.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는 의견이나 감정이 부리는 횡포, 그리고 통설과 습관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회가 법률적 제재 이외의 방법으로 윽박지르며 그 통설을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경향에도 대비해야 한다. (p.27)

     


돌이켜보면 나는 원조 혼밥러다. 대학 다닐 때부터 혼자 밥 먹고 혼자 도서관 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교성도 좋고 공동체 생활에도 익숙했지만 간간히 외로움을 즐겼다. 그때부터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인간이었던 거다. 대학 졸업 후 취업 재수유학생활도 꿋꿋하게 혼자 해냈다. 


귀국 후 방송사에 취업을 했는데 퇴근 후 술자리가 힘들었다. 근무시간에 집중해서 일하고 칼 퇴근해서 방에 틀어박혀 책을 읽고 싶었다. 그런데 방송 PD라는 직업은 선후배가 밀착된 사수 관계로 촬영도 편집도 밥도 술도 밤샘도 함께하며 부대끼는 도제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회사에서 야근하며 밤샘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여전히 술 마시며 왁자지껄 떠드는 게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그때는 ‘선배들이 나한테 왜 냉랭한 걸까?’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그들에게 마음 문을 활짝 열지 않고 ‘개인주의자’ 영역을 고수하고 있었던 거다. 한 선배가 나를 ‘실용적인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꼬집었다. ‘끈끈한 코리안 스타일’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독립적인 성향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남들이 우르르 몰려간다고 해도 그쪽으로 가기 싫은데 어쩌겠는가. 이런 성향 때문에 물 위의 기름처럼 표류하는 느낌이 꽤 오래 지속됐다.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북유럽에서 태어났다면 좀 더 마음 편히 살 수 있었을까?


이제 우리 사회에서 ‘혼밥’과 ‘칼퇴’는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미움받을 용기’를 독려하며 자기 목소리를 독려하는 사회로 변하고 있다. 20년쯤 늦게 태어났더라면 내 성향대로 살기가 좀 수월했을까? 오십 년을 살고 이제 비로소 나의 개인주의 성향을 온전히 끌어안게 됐다. 이렇게 생긴 나를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동시에 그동안 바라보지 못했던 타인들을 보게 된다. 나의 ‘개별성’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집단주의 성향’도 소중한 것인데 그것을 우습게 생각했다. 사장이 바뀔 때마다 부화뇌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왜 저렇게 소신이 없지?’ 한 뼘 아래로 내려다봤다. 군중과 달리 나는 고상하고 세련되게 ‘자아실현’을 하며 산다는 오만함이 내 안에 있었음을 고백한다.


세상에는 불편한 진실이 많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고, 권력은 좀 썩어도 쥐고 있으면 달콤하고, 군중 속에 묻혀 있을 때 남을 비난하는 일은 한결 쉬어진다. 온라인 여론의 쏠림 현상으로 ‘다수의 횡포’가 자행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어떤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의 수가 많다고 해서 소수 의견을 함부로 침해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Mill은 말한다. ‘집단의 생각이나 의사가 개인의 독립성에 함부로 관여하거나 간섭해서는 안 되며’ 이는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는 그의 글을 곱씹어본다.


수없이 흔들렸지만 이제 독립된 인간으로서

내 삶을 편안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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