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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칠성상회 Jan 17. 2021

눈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올 겨울엔 벌써 두 차례, 여러 날에 걸쳐 큰 눈이 내렸다. 맑은 날보다는 비 오는 날, 그리고 비보다는 눈을 더 좋아하는 터라, 하늘이 어두워지고 창 밖의 공기가 맵싸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창문을 수시로 열어보며 눈이 내리기를 기다린다.


부엌에 서서 뒷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히말라야 시다의 검은 초록을  배경으로 나풀거리며 떨어지는 흰 눈송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자질구레한 생활의 흔적과 소음이 흐릿해진다. 눈 내리는 풍경이 나에게 선사하는 안온함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른 오후부터 하늘이 무거운 오늘, 엄마와의 시시콜콜한 통화가 길어졌다.  

- 엄마, 날이 또 추워지네. 낼모레 또 눈 온대요. 엄마도 눈 오는 거 좋아해?

- 응, 개가 아니라 못 뛰어다녀서 그러지, 난 눈 진짜 좋아해야.

강아지들만큼이나 눈을 좋아한다는 엄마의 급진적인 표현에 모녀는 웃음을 터뜨린다.


꼬마일 적에는, 눈이 내렸다 하면 뛰쳐나가는 네 딸들의 외투와 장갑, 장화를 살뜰히 챙겨주는, 금세 축축해져 돌아오는 그 전투 장비들을 보송하게 말려주는 엄마가 있었다. 눈놀이가 시시하게 느껴질 만큼 머리가 크고 난 후의 겨울날에는, 도톰한 조끼를 입고 거실에 앉아 먹거리를 손질하거나, 가을에 거둔 곡식을 골라 제각각의 용도로 갈무리하느라 늘 바쁘던 엄마가 있었다.


그런데 우리 엄마가 눈이 오면 설레는 맘으로 창 밖을 바라보신다는 거지. 어쩐지 더 향긋한 커피를 호록거리며 눈 구경을 하신다는 거지. 그래, 내가 어디서 나왔겠나 싶어 슬그머니 웃음이 나다가 도통 엄마의 기호라는 것이 어떤 것들을 향해 반짝이는 지를 궁리해본 적이 있었는가에 생각이 닫는다.


나에게 쏟아지는 온갖 마음을 내리사랑이라는 말로 당연하게 취하면서 엄마의 인생에 -자식을 제외하고- 기쁨을 주는 요소들을 자신 있게 꼽지 못하는 것은, 무지라고 쓰고 싶지만 무관심이 차라리 옳은 표현이겠기에 가슴이 서늘하다.


밤이 깊어, 어제의 푹했던 날씨가 무색하게 눈송이가 또 하나씩 날린다. 이런 날에는 글이 더 달게 읽힌다. 눈을 사랑하는 엄마에게 오늘 도착한 박완서 선생님의 산문집을 드리겠다. 나는 엄마의 딸이라 적어도 이 책 한 권이 엄마의 겨울날을 더 행복하게 해 주리란 것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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