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뇌의 기억과 몸의 기억

몸이 기억하는 일/감정

by Chang

이 글은 등장 어르신들의 정보 보호를 위한 각색이 많습니다.




이틀 뒤.

더운 날이었다.


아침 10시. K할머니집 마당에 차를 주차한 후 주변 텃밭부터 살폈다. 처음 할머니를 만났던 날처럼, 무의식적으로 텃밭에 나와 풀을 뽑고 계실까란 걱정 때문이었다. 다행히 집 주변 텃밭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은 할머니가 집안에 있다는 의미였다.


할머니가 계신 2층으로 올라가 현관문 벨을 눌렀다.


딩동-


근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다시 벨을 눌렀다. 하지만 이번에도 할머니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괜한 걱정에 연이어 여러 번 벨을 눌렀지만, 역시 아무도 없는 것처럼 반응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할머니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는 가지만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다. 여러 번의 통화 실패 후에 관장님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전화를 안 받으신다고요? 일단 내가 알아보고 연락 줄 테니까 벨이든 문이든 두드리면서, 어르신 성함을 불러봐요."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끊자마자 어르신의 이름을 부르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혹시 나쁜 일이 생긴 건 아닐까란 걱정이 들었지만, 이틀 전 할머니의 건강은 무척이나 건강했다. 치매 초기라 단기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것 말고는 혼자서 생활하실 정도의 인지는 충분히 좋은 어르신이었다.


문을 두드리다 일주일마다 갔던 요양원 실습이 떠올랐다. 저번 주에는 괜찮았던 어르신이, 일주일 뒤에는 치매가 진전돼 문제 행동을 일으켰던 상황이 말이다. 그때 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큰일이네. 전화를 걸었더니 받기는 하네요? 근데 어르신께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끊어요. 조용한 거 보니 집 안에 있는 건 맞는 것 같거든요?"

"그럼 제가 더 어르신을 불러볼게요."

"네. 부탁할게요! 전 보호자와 전화해 볼게요. “


재빨리 전화를 끊은 후 다시 할머니의 성함을 외쳤다.

얼마나 반복됐을까. 현관문 안쪽에서, 드르륵 소리와 함께 거실 중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굽은 허리로 현관문을 열어준 할머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틀 전에 왔던 날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아무 일 없어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안심부터 됐다.


나는 할머니에게 이틀 전 처음 방문한 임시 요양보호사라고 설명한 후 함께 집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소파에 할머니를 앉힌 후 상황 파악을 해보니, 전화받는 법이 기억이 나질 않아 통화를 못했다는 걸 알게 됐다. 이틀 전 나와 연습을 했음에도 기억을 못 했던 거였다. 혹시나 해서 다시 전화받는 법, 통화하는 법을 연습했다. 이틀 전보다 이해가 느리다. 순간 할머니의 치매가 이틀 사이에 더 심해진 게 아닐지 걱정이 됐다.


일단 머니가 아침 식사와 아침 약을 잘 챙겨 먹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다행히 끼니와 약은 챙긴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화장실 이용도 평소처럼 스스로 잘하시는 것도 확인했다. 식탁에 할머니를 앉힌 후 기본적인 인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벼운 테스트를 했다.


할머니의 성함과 나이, 자녀들의 이름. 그리고 간단한 단어 읽기 등을 말이다. 다행히 자녀식들과 본인의 기억엔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다. 10 이상의 숫자는 세지 못하고, 전화받는 법과 거는 법은 계속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자녀들의 이름을 물어서 그랬을까? 갑자기 할머니께서 옛날 얘기를 꺼내셨다.


"내가 젊었을 때 고생을 진짜 많이 했어요."


할머니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요양원의 A할머니처럼 빠르게 시집왔던 과거로 이동했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말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있던 할머니는 드디어 눈앞에 무언가가 그려졌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잇기 시작했다.


”어릴 때 시집와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시아버지 술 심부름에 밭일하느라 정말 쉬지도 못하고 매일 일만 했거든.”

“술 심부름에 밭일까지요? 와. 고생 진짜 많으셨겠다.”


나는 공감을 하다 첫날, 할머니가 자기도 모르게 밭일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더라는 웃픈 상황 말이다.


즉 할머니의 밭일은 70년 넘게 한 일을 몸이 기억한 탓이었다. 찹찹한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할머니의 회상이 이어졌다.


“내가 살았던 곳은 여기서 멀지 않은 00동이었어요. 근데 여기로 시집왔어. 19살 때 중매로."

"19살 때요?"

"응. 그냥 뭣도 모르고 시집왔어요. 어른들이 시집가라니까."


할머니는 당시 상황을 어이없어하다, 갑자기 나를 바라봤다.


“내가 근데 올해 몇 살이라고 했어요? 아흔둘인가 아흔셋인가...”


처음 방문했던 날, 할머니는 자신의 나이를 아흔둘이라고 확실하게 말했었다. 근데 이틀 후인 지금은 자신의 나이를 헷갈려한다.


"처음 만났던 날, 저한테 아흔둘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요? 그럼 여기 시집온 지 몇 년이나 된 거지...."

"한 70년은 훌쩍 넘으셨네요."

"70년이요? 아이고... 세월 참 빠르다."


할머니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혀를 내두르다, 조용히 TV 옆 작은 액자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70대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누굴까. 큰아들일까 아니면 할머니의 남편일까. 나는 할머니를 따라 조용히 액자를 바라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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