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보호사
이 글은 등장 어르신들의 정보 보호를 위한 각색이 많습니다.
#13에서 적었듯, 나는 요양원 마지막 날 B할머니의 치매가 좀 더 심해진 모습을 목격했다. 매주 일요일마다 총 5번을 갔던 실습 기간 동안, B할머니의 치매가 계속 진행된 거였다.
나는 아들과의 통화를 요구하며 화를 내는 B할머니를 뒤로한 채, 엘리베이터의 비밀번호를 누른 후 사무실이 있는 1층으로 내려갔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다시는 오지 못할 4층과의 마지막이었다.
마지막이었지만 어르신들에게 작별 인사는 하진 않았다. 그저 “다음 주에 또 올게요”라는 인사로 마무리했다. 대부분의 어르신들이 나를 기억하지 못했기에 ‘작별’보다는 ‘다음’을 기약하는 게 더 나아 보여서였다.
사실 치매 초기였지만 인지가 또렷해 보였던 D할머니도 매주마다 날 기억하지 못했다. D할머니는 실습날마다 내 손이 따뜻하다며 자주 손을 잡아주셨고, 같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어르신이었다. 요보사 선생님들과 실습생인 나에게 늘 미안하다, 고맙다는 인사도 빼놓지 않던 분이었고.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할머니에게 난 처음 보는 실습생이었다.
5일간의 요양원 실습의 끝.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한 후 나는 동료 교육생들과 회의실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 실습 보고서를 쓰며 여러 어르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요보사들이 버거워했던, 집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던 A할머니. 집에 가서 목욕을 하겠다며 목욕을 거부하고 아들에겐 통화를 거부당한 B할머니.
요양원이 싫다며 자녀와의 외출 면회만 손꼽아 기다리던 F할머니. 치매 말기라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고 식사도 양손으로 드셨지만, 좋아했던 옛 노래만큼은 너무나 잘 불렀던 G할머니.
입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안해하던 H할아버지. 자신이 땅부자라며 할머니들에게 추파를 던지던 I할아버지. 마지막으로 과거에 선생님이었다며, 자녀를 위해 요양원에 입소했다고 속삭이듯 털어놨던 J할머니까지.
그날 난 실습 보고서의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적었다.
“요양원의 요양보호사가 이렇게 힘든 직업인지 몰랐다.”라고.
그 말에는 처우에 대한 힘듦도 있었지만, 요보사라는 직업이 정신적으로도 버거운 직업이란 걸 의미한 거였다.
생각보다 어르신들과의 유대감이 깊게 형성되는 면이 있었다. 많이들 외로워하셨기에 정서적 밀착이 안 생길 수가 없었다. 요보사의 업무 중 하나가 그런 걸 위한 정서 지원도 있으니까. 하지만 유대 관계가 생긴 어르신들이 병세가 점점 나빠져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 그걸 지켜볼 요보사의 정신적 충격도 무시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요양원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중,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도 현장엔 인력 부족이 넘친다는 말이 떠올랐다.
고작 80시간의 실습을 겪은 나였지만, 처우에 대한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요양원은 보통 3교대 근무를 한다. 그리고 연봉은 최저 시급보다 조금 높다. 힘든 일에 비해 급여가 적은 이유를 직원에게 묻자 예상 밖의 답이 돌아왔었다.
“급여를 올리면 젊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요. 하지만 이건 중장년층을 위한 일자리라서 젊은 사람들이 장악하면 안 돼요.”
사실 나는 그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어르신을 돌보는 일은 생각보다 강한 체력이 필요하다. 내가 본 5~70대의 요보사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그리고 요보사를 많이 뽑아주지도 않는다. 결국 체력과 정신이 고갈되게 되고, 그로 인해 서비스의 질이 떨어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즉 어르신들이 더 나은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구조적인 이유로 박탈한 셈인 거다.
그래서 요보사라는 직업을 지금은 못 하겠다고 판단했다. 가장 큰 계기는 어머니를 맡기기 위해 연락했던 여러 노인 주간보호센터나 방문요양기관에게 느낀 실망감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