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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ck Jun 01. 2023

필라테스 강사는 일상에서의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클래식 필라테스 강사에게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알아차림'이다. 제대로 된 운동은 동일한 방식을 반복하는 행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방식의 방향이 더 파생되어 나갈 뿐, 운동의 행위는 비슷하다. 매일 다르다면 그것은 제대로 된 운동이라기 보다 유희로서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반복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을 보게 되었을 때 강사는 그들의 다름을 알아차려야 한다. 운동의 행위는 동일하게 반복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강사는 그것을 알아차리는 시각을 길러야 한다. 그런 시각은 일상생활에도 접할 수 있다. 


'매일 지나가는 길이 다르게 느껴질 때'

'사랑하는 사람의 변화를 알아차릴 때'

'반려견의 눈빛이 무엇인지 인지할 때'


'알아차림'은 일상 속에 언제든 행할 수 있다. 그래서 필라테스 강사라는 직업은 일상에서의 행위가 중요한 직업 중 하나라고 감히 생각한다.


나의 반려견 루시는 변화를 감지하면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짖거나, 달려오거나, 일정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7년 가까운 시간 동안 루시가 나의 표정, 움직임, 목소리의 변화를 알아차리듯 나도 녀석의 눈빛, 움직임, 소리를 들으면서 모든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밤 11시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루시는 보통 옆에 누워있거나 아내 곁에 있다. 루시는 원하는 게 있을 경우 서재에 들어와서 내게 요구한다. 단순하게 서재에 나를 확인하러 오는 경우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이 곁에 엎드려있다. 그런데 무언가 원하는 게 있는 경우에는 걸어오는 발소리조차 다르다. 들어와서 나를 쳐다보는 눈빛, 녀석의 움직임에서 확실한 요구를 알아차린다. 그것은 산책이다. 책을 읽을 때는 방해받기 싫어서 모르는 척하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기운을 무시할 수 없다. 


"왜 그래 뭘 원하는데?"


루시의 표정과 움직임은 확실하게 산책을 원한다. 밥을 원할 때 표정과 산책은 원할 때 표정은 아주 미세하게 다르다. 나는 그것을 알아차리고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거실로 향한다. 그리고 아내에게 말한다.


"기어이 산책을 가재. 가고 싶대."

"산책 가고 싶나 보네."

"그런가 봐 강렬하게 쳐다보네.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




필라테스 강사로서 가지고 있는 '알아차림'의 방식은 반려견과의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렇다면 매번 동일한 행위를 지속하는 고객의 움직임은 철저하게 알아차려야 할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 소설 1Q84의 주인공 아오마메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미묘하게 변화되었음을 알아차린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주인공 덴고는 자신의 변화에 대해 허덕일 뿐 세상의 변화는 눈치채지 못한다. 아오메마는 운동 강사이다. 신체의 기능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의 기운을 느끼고 알아차린다. 그녀가 가진 '알아차림'의 능력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강사가 가진 '알아차림' 능력은 피곤하지만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파생적인 가치를 자아낸다. 정말 조셉 필라테스가 말한 일상 속에서의 'Return to Life'인 것이다. 일상에서의 변화는 더 나아가 움직임에서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움직임조차 일상 속 범위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은 자신의 일상의 범위를 조금씩 확장해 준다. 단순한 일상의 반복 속에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예술적 시각에 대한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대표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시각에 대한 '알아차림'이다. 



얼마 전 아내와 함께 조조영화를 보러 갔다. 유명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물의 길]이었다. 3시간이 넘는 영화였지만 우리 부부는 단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는 아바타 1의 내용이 이어졌다. 


영화가 주는 첫 번째 관점으로 주인공 제이크 설리를 바라보면, 그는 나비족에게는 영웅이지만 인간들에게는 배신자이다. 제이크 설리와 그의 아내 관점에서 미시적으로 보게 되면 그들이 죽인 대령은 한없이 악한 인간이다. 그들의 삶을 빼앗은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해관계없이 대령이라는 인물을 한 개인으로 바라보게 되면 다른 관점을 나타나게 된다. 그는 탐욕 가득한 사업가가 아니다. 옳다고 생각되는 신념을 갖춘 군인이다. 그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에 가져다주어야 할 물건이 나비족에게 있을 뿐이다. 만약 탐욕 가득한 인간이었다면 주변에 진심으로 따르는 군인들은 없을 것인데, 많은 군인들이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감명받는다. 그리고 진심으로 따른다. 제이크 설리도 그런 군인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가벼운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대령의 입장에서 제이크 설리는 자신을 배신한 역겨운 인물이다. 제이크 설리에 대한 복수심만 가득하기에 어쩌면 그의 모습은 순수하다. 


관점에 대한 알아차림이 필요하다. 영화가 주는 첫 번째 관점은 단순하다. 


'인간은 악하고 나비족은 선하다'

'자연 파괴를 일삼는 인간은 악하다'

'나비족을 괴롭히는 대령은 악하다'


그런데 여러 번 생각해 보면 단순하지 않다. 앞서 말했듯이 대령의 입장으로만 보아도 여러 이해관계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인간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행성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생과 사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나비족의 입장과 동일하다. 아바타 1에서는 물질에 대한 욕심이었다면, 아바타 2에는 두 종족 모두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는 것에 동일하다. 




웃길 수 있겠지만(나는 진지하다) 클래식 필라테스 강사가 가진 '알아차림'의 기능은 이렇게 영화까지 영향을 미친다. 알아차림은 관점의 차이에 대한 변화를 느낄 수 있게 한다. 미세한 변화를 느낄 수 있는 능력은 미술에 영향을 미치고 음악까지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세한 변화는 '알아차림'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아차림에 대한 능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의미로 '예민하다',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실 미세한 변화에 대한 '알아차림'은 예민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기능이다. 


'예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태생적으로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소리, 움직임, 후각 이런 여러 요소에 대한 미세한 변화를 잘 느낀다. 모든 것에 예민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예민한 사람만이 '알아차림' 기능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서 필라테스 강사는 '알아차림'의 기능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다양한 리포머의 움직임을 반복한다'

'다양한 매트의 움직임을 반복한다'

'다양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바라본다'

'다양한 움직임의 소리를 반복적으로 듣는다'


움직임과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듣고, 보고, 말한다. 자신의 움직임을 반복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의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느낄 때, 필라테스 강사는 '알아차림'의 기능을 충분히 가질 수 있게 된다. 영화 아바타 대령의 모습을 보면서 일차원적 관점에서 벗어나듯이, 사람의 움직임을 일차원적 관점에서 벗어나면 그들의 움직임은 속박되지 않고 자신만의 속도대로 자유롭게 움직이게 된다. 영화의 관점에서 자유롭듯이 말이다. 그리고 폭넓게 생각하면 '알아차림'의 기능은 필라테스 강사에게도 필요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능이다.


'일상에서의 회복'

'일상에서의 변화'


일상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클래식 필라테스의 알아차림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다. 일상 속의 변화는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도 예민한 '알아차림'을 발전시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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