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싱가포르에 와서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거의 안 되는 아이들이 한국인도 전혀 없는 환경(호주 학교는 미국계 학교보다 한국인 비율이 현저히 낮은 편)에서 잘 견딜 수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유학을 결정하고 준비기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만큼 바로 현지인들의 영어를 따라잡기에는 많이 부족한 실력이었다.
아이들은 어찌 됐든 금세 적응한다, 1년 안에 너보다 영어를 더 잘할 거다, 둘째는 어리니까 더 빨리 따라온다는 등의 긍정적인 멘트를 해주는 사람들이 대부분. 하지만 한국에서 잘하고 있는 아이들인데 외국에 가서 당장 영어를 못해 왕따 취급당하는 거 아니냐라는 기우도 가끔씩 있었다(주로 어르신들;;)
우리도 나름대로 많은 것을 알아보고 싱가포르로 떠나기로 이미 각오를 한 바, 최소 6개월에서 아니 1년 동안은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더라도 아이들의 저력을 믿고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러한 밑바탕에는 아이들의 성향도 한몫했다고 본다.
내 아이들의 경우 친구가 굳이 없어도 전혀 불안해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 독립적인 성격이다. 친구야 있으면 즐거운 것이고 없어도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 되는 쿨한 타입들이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거는 등 외국인들에게 긍정적인 시그널로 여겨지는 적극성이나 활발함은 다소 떨어져서 우리 아이들을 진가를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리는 편이다.
외국 아이들의 따뜻한 환대, 친구복이 있었네
그래도 한국에서 4년 동안 학교생활해보고 5학년이 된 첫째 딸아이는 한국 아이들과 외국 아이들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새삼 실감한 모양이었다.
저학년부터 남녀끼리 구분이 철저하고 무슨 이슈가 발생하면 아이들 사이에선 칭찬이나 위로보다는 무관심하거나 놀림감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 아이들은 눈만 마주쳐도 남녀를 가리지 않고 'Hi'라고 인사해주고 매우 사소한 것에도 'Thank you'나 "Sorry", "Are you okay?" 등등 살갑게 말을 붙여주는 모습에 기분 좋은 문화충격을 받았나 보다. 여자 친구들은 별일도 아닌데도 그냥 이름을 부르며 빅 허그를 해주는 통에 어리둥절하기도 했단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딸아이의 표정에서는 기쁨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외국 아이들이 은근히 순진한 구석이 있는 데다(한국 고학년 아이들의 특유의 영악함을 찾아볼 수 없음) 같은 반 아이들 대부분이 모난 데 없이 착한 아이들이었다. 한국인이고 영어를 잘 못한다고 따돌림 비슷한 것도 전혀 모르고 너무도 즐겁게 적응하며 1년을 잘 보냈다.
EAL코스도 조기에 마치고 지금은 6학년(여기선 세컨더리, 중학생 시작)이 된 첫째는 이제 베프 그룹까지 생겼다.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크게 느껴보지 못한 살가운 외국 친구들의 우정으로 행복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다
작년 초반만 하더라도 나는 애들이 집에 오자마자 얼굴부터 살피기 바빴다. 혹시나 그늘이 없는지 스트레스는 없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항상 나의 기우로 끝나곤 했다. 항상 싱글벙글 기분 좋게 들어왔다. 어찌나 다행인지.
나름 추측해 본 결과 매일같이 아이들의 얼굴이 환한 이유는 외국인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칭찬문화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내가 체감해 봐도 그들의 억양과 제스처 그리고 뉘앙스에서 느껴지는 칭찬은 한국인의 것과는 결이 다르다. 응? 내가 이렇게 괜찮은 건가? 움츠렸던 자신감이 뿜뿜 생겨날 지경이다.
어딜 가나 외국 가면 한국 아이들이 수학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데 학습적인 면에서는 한국에서 평범한 축에 속했던 두 아이들도 여기와 서는 '역시' 소리를 듣는다. 한국 아이들이 그렇듯 한 학기 정도의 선행을 해온 결과 수학은 학급에서는 언제나 탑 수준으로, 상담 때마다 담임 선생님의 폭풍 칭찬세례를 들을 수 있다.
중국어의 경우는 낯선 글자때문이라도 외국 아이들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아이들도 중국어(한자)도 이곳에서 처음 시작하는 케이스인데 아직 기초적인 수준이라 오히려은근 재미있어했다. 또 우리나라가한자문화권이라 그런지 외국 아이들보다는 확실히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 그래서인지 먼저 배우고 있던 그들을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특히 중국어 수업은 수준별로 진행하는데 첫째의 경우는 반년만에 심화반으로 올라가고 내년에는 중국 아이들도 듣는 수준의 반 수업에 참여하게 될 거라고 한다.
우리가 냉정하게 보기에는 잘해야 중상 정도 수준인데 학교에서 그렇게 취급을 당하니 왠지 본인이 공부를 잘하는 아이로 인식되는 효과가 있어 긍정적이긴 하다. 기대에 부응하려 어떻게든 더 잘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고 그로 인해 자신감과 자존감도 동시에 높아지는 게 눈에 보였다.
특히 활달하고 표현력이 남다른 외국 친구들의 영향인지 몰라도 딸아이의 경우 조용하고 소심하게 비치던 성격 자체가 점차 적극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 초에는 아직 영어도 능숙하지 않은데 클래스룸 리더(반 회장)와 인터내셔널 리더(외국인 중 전체 회장) 선거에 스스로 나간다고 해서, 아니 어디서 그런 근자감이?? 하며 속으로 내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물론 보기 좋게 둘 다 떨어졌지만) 한국에서는 내가 "너도 회장 선거 좀 나가봐" 등 떠밀어 억지로 나가보기만 했던 경험과는 달리 정말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