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국제학교 다니는 평범한 아이들의 기록
우리 부부는 한국의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더 글로벌한 환경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며 영어까지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환경을 아이들에게 제공하기 위해 유학에 뜻을 모았다.
우선적으로는 안전하고 인종에 대한 차별 없는 환경일 것, 주 양육자인 엄마(나)가 살아가는 데 큰 불편이 없도록 의식주 관련 시설이 편리한 곳, 마지막으로는 언제든 양국을 오갈 수 있도록 한국에서 너무 멀지 않은 위치(하지만 무색하게도 유학 후 2개월 만에 코로나 사태가 터져버림) 등을 주요 이슈로 꼽았다.
그렇게 선택된 곳이 바로 싱가포르. 기본적으로 안전하고 편리한 생활문화 환경에 다민족 국가면서 글로벌 경제도시이기 때문에 현지에 체류 중인 외국인에 대해서도 우호적이며 관대한 편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영어를 제1 공용어로 사용하는 점(물론 일상생활에서는 싱글리시가 자주 들리긴 하지만)과 인종의 74% 정도가 중국계인 결과 공립학교는 물론 국제학교에서도 중국어가 필수 교과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점도 매력적인 요소였다.
유학을 결정하기까지 시간이 그리 길게 걸리지 않았던 터라 당장 아이들의 영어 수준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 아이들은 영유도 아닌 일반 유치원을 졸업하고 공립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영어는 고만고만한 했다. 첫째는 그나마 2년째 동네 영어학원을 다니고 있었지만(그래 봤자 스피킹은 전혀 안 되는 상황) 둘째는 학원은커녕 이제 막 파닉스를 떼고 아주 쉬운 스토리북을 겨우 떠듬떠듬 읽는 수준이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입싱 후 학교 테스트 결과 우리 아이들은 현지 수업을 바로 따라가기에는 부족하기에 EAL(English as an Additional Language) 코스, 그것도 begginner과정을 들어야 했다. 보통 영어가 부족한 아이들은 홈룸(메인 교실)의 리딩이나 라이팅 시간에 EAL반에 가서 영어 수업을 받고 다른 학과 시간에는 다시 홈룸에 합류하는 식이다.
학교에서는 Begginner(초급, 1년)와 Transition(심화, 1년)으로 나누어 보통 2년이 기본코스라고 했다. 입싱 초반, 우연찮게 학교 한국 엄마들이 모인 자리에 들은 이야기로도 EAL코스가 거의 1년 학비와 맞먹기 때문에 학교 측에서도 수입면에서는 아주 반가운 입장이라 어떻게든 2년을 채워놓는다고 했다.
안 그래도 후덜덜한 학비에 놀란 가슴, EAL 2명 x 2년(어마어마한 돈...)치를 추가로 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했다.
영어라는게 단기간에 확 늘어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당장 영어학원도 알아보고 1:1 과외도 해봤지만 공부 시간과 들어가는 돈에 비해 우리가 원하는 목표는 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과감히 3개월 만에 학원이며 과외를 다 끊고 집에서 남편과 내가 한 명씩 붙잡고 단어와 문법, 라이팅을 집중적으로 공부시키기로 했다. 남편이나 나나 누굴 가르쳐 본 영어 전문가도 아니고 오랜만에 교재를 잡고 보니 새삼스러운 것도 많아서 서로 다시 공부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래도 학원 가서 시간만 때우다(뭘 배우고 오는 건지 모르고) 오는 것보다 그게 훨씬 효율이 높았다.
그나마 고학년인 데다 한국에서 영어 학원을 맛본 첫째는 부족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가르치니 어느 정도 감을 잡아갔다. 6개월이 지나자 이제 EAL 수업내용이 자기에게는 너무 쉽다고도 했다. 반에서는 누구보다도 과제 빨리 마무리하고 추가과제를 더 하는 등 선생님에게도 열심히 한다는 어필을 끊임없이 내보였다. 본인도 내년이면 중학생 취급을 받는 6학년(호주 학교는 6학년부터 세컨더리)이 되는데 EAL반에서 수업하고 있는 게 약간 창피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심 내년에는 심화반으로 올라가겠구나 생각이 들어 학기가 끝나는 상담 때는 선생님께 아이의 실력이 향상됨을 어떻게든 어필하는데 주력했다. 물론 참고는 하겠지만 어차피 결과는 테스트에 따라 판가름이 나는 거지만.
두근두근... 12월, 모든 학기가 끝나고 마지막 테스트 결과를 기다렸다.
학교 생활하면서 한국인이 전혀 없는 반 아이들과 제법 잘 어울리면서 영어 몰입의 결과인지 나름 집에서 열심히 한 결과인지 첫째는 무려 1년 만에 조기 EAL 탈출에 성공했다!!
첫째의 담당 EAL 선생님은 보통 심화과정을 들어도 다음 해에 바로 졸업하지 못한 아이도 많다, 초급단계에서 바로 졸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며 그녀는 정말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다며 아이를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될 거라고 축하 메일을 보내주시기도 했다. 오 이게 정녕 꿈이냐 생시냐 정말 감격!!
뿐만 아니라 둘째의 성장도 놀라웠다. 첫째처럼 완전 졸업은 아니지만 연말에 초급반에서 심화반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집에서 가족과 있을 때는 매우 까부는 아이지만 남과 하는 수업시간에는 초집중하는 스타일(1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표현에 따르자면 눈에서 레이저가 나온다고 함)이라 학습태도가 다소 산만한 다른 외국의 아이들과 비교해 모범생 이미지로 보였나 보다.
심화반에 올라간 지 두 텀이 지난 6월, 학기 중간이었지만 더 이상 EAL수업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담당 선생님의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총 1년 반 만에 EAL을 탈출한 것이다. 우리는 솔직히 둘째의 결과가 더 믿기지 않는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속성으로 2개월 공부했던 게 고작인 영어 무식자(!)였기 때문에 우리 부부는 큰 기대를 안 했고 당연히 EAL과정을 2년은 꼬박 채울 줄 알았다.
물론 요즘 한국에서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엄마표 영어로 꾸준히 실력을 올리는 아이들부터 영유 출신도 흔해지고 워낙 학원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날고 기는 실력의 아이들이 많아 저런 이야기는 코웃음 거리일 수도 있겠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에서 예체능 학원이나 좀 다녔지, 공부에 너무 목숨 걸지 말자라는 우리 부부의 마인드 때문에 유아 때부터 그 흔한 한글, 수학 학습지 조차 안 시켜봤다. 학교 입학 후 그냥 한 학기 선행 문제집 정도 풀리는 수준이었다. 영어 노출도 적고 학습적으로 지극히 평범한 아이들의 성과 치고 이 정도면 괜찮은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아이들이 대견하다는 벅찬 감동은 잠시, 어마 무시한 돈이 굳었다는 기쁨에 서로 부둥켜안고 와인파티를 했다. 지난해 말 EAL 탈출에 성공, 무려 1년 치 학비를 아껴준 첫째에게는 따끈따끈한 신형 아이폰 11은 헌사해드렸다. 올해 6월 졸업한 게임 좋아하는 둘째에게는 아빠가 싱가포르에 들어올 때 선물로 엑스박스를 사 오기로 했다. 하지만 한국과 싱가포르의 입국이 막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는 슬픈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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