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하루를 품는 법

by 이고운

오랜 자취 생활이 무색하게도, 가끔 물 조절에 실패해 서걱거리는 밥을 짓고 마는 날이 있다. 예전 같으면 뚜껑을 열자마자 자책 섞인 한숨부터 내뱉었겠지만, 요즈음의 나는 그저 뜸을 조금 더 들이거나 "나름대로 고슬고슬하네"라며 심드렁하게 넘기는 법을 배운다. 어쩌면 산다는 건, 매일 다른 온도로 지어지는 밥을 묵묵히 마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여자로, 사회인으로, 혹은 누군가의 딸이나 이름 모를 조연으로 살아가다 보면 하루라는 냄비 속에 너무 많은 욕심을 집어넣게 된다. 남들 보기에 예쁜 모양으로 썰어 넣고 싶고, 간도 딱 맞추고 싶은 마음에 정작 나 자신은 불 앞에서 땀을 흘리며 초조해한다. 하루의 끝에서 거울을 마주할 때, 번진 화장과 흐트러진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초라한 성적표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언니가 되어주기로 했다. 귓가에 낮게 속삭여주는 것이다. "오늘 하루도, 이만하면 됐다."


이 말은 설거짓거리를 쌓아두는 게으름과는 다르다. 온종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마음의 단추를 비로소 하나 풀어주는 일. 누군가의 무례함을 받아내느라 닳아버린 인내심을 다독이고, 상사의 무심한 말 한마디를 견뎌낸 자존감을 보듬으며, 만원 지하철 속에서 꿋꿋이 버틴 나의 마디마디를 어루만지는 절실한 의식이다.


화려하게 차려진 정찬은 아닐지라도, 오늘 내가 차려낸 시간의 식탁은 충분히 온기 있었다. 계획했던 운동을 건너뛰었어도, 읽으려던 책의 첫 문장에서 멈췄어도 괜찮다. 적어도 나는 오늘이라는 파도를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며 건너왔으니까.


깨끗이 세수한 얼굴 위에 수분 크림을 도톰하게 얹듯, 거칠어진 마음 위에도 넉넉한 용서를 펴 바른다.

"애썼어. 정말이지 이만하면 충분해."


그 한마디에 뾰족했던 영혼의 모서리가 포근한 솜이불처럼 부풀어 오른다. 내일은 또 어떤 밥이 지어질까. 물이 많아 질척일 수도, 불이 세서 밑바닥이 타버릴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다. 어떤 하루가 차려지든, 나는 나를 기꺼이 대접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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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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