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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욱근 Mar 23. 2020

봄이란 무엇인가


나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께서는 삼월만 되면 집에 가만히 계시질 못하고 밖으로 나다니셨다. 딱히 가야 할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유 없이 차를 몰았고, 이유 없이 공원을 거닐었다. 왜 그러냐 물어볼 때면 ‘봄’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대답만 늘어놓으셨다. 아직 이렇게 입김이 폴폴 새어 나오는데 도대체 어디에 봄이 있다는 건지 또 봄이 오면 뭐가 어떻다는 건지 몰라 부모님의 마음에 동조할 수가 없었다. 나에게 봄은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개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봄은 그저 어른들의 향유물이었다.


나는 또 한 번의 겨울을 보낸다. 졸업 후 두 번의 겨울, 그러니까 스물넷의 겨울과 스물다섯의 겨울. 두 겨울을 보내면서 느낀 건, 겨울은 언제나 춥다는 것이었다. 자취방에서 공부를 하던 나는 갑갑한 기운이 들어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그때, 난데없이 따뜻한 바람이 흘러 들어왔다. 분명 어제 까지만 해도 매서운 겨울바람이었는데. 신기한 마음에 창문에 코를 대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날의 공기는 삼월의 햇살을 넉넉히 머금고 있었다. 쌉쌀한 흙냄새 같은 것도 났다. 손으로 만져 보진 않았지만 얼었던 땅이 점차 녹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곧 날이 풀리고 꽃이 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 답답함도 날씨와 함께 풀리지 않을까. 문득 밖으로 나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나는 사람들을 따라 삼월의 공기를 마시는 일에 동참했다. 따스한 햇볕에 땅은 바삭하게 구워져 있었고 나는 까치발을 들고 땅 위에 난 싹을 요리조리 피해 걸었다. 그렇게 걷길 한 시간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꽃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분홍빛 자태를 뽐내는 ‘라넌큘러스’. 안개꽃 속에 쌓여 있는 ‘라넌큘러스’가 그날의 공기와 너무나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갑에 있던 만이천 원 중 만원을 내고 그 꽃다발을 샀다. 그리고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아이의 손에 꽃을 쥐어 주었다. 


부모님께서 삼월만 되면 왜 그렇게 유난이셨는지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꽃은 기다린 사람에게만 향기를 뿌린다. 그 꽃집은 내가 자주 다니던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겨우내 그 자리에 있었던 꽃집이었음에도 내가 볼 수 없었던 것은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무엇 하나 내어주지 않는 매정한 겨울을 원망하며 내내 움츠리고, 숨어들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여느 사람들처럼 봄을 기다려 보았고, 밖으로 찾아 나섰다. 그제야 꽃들은 내게 봄 향기를 전해주었다. 부모님은 이 사실을 진작 알고 계셨나 보다. 벌들이 꿀을 기다리는 것처럼 부모님은 꽃 향기를 맡기 위해 남들보다 한 발 먼저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봄꽃이 진 자리에 여름 꽃이 피어나듯, 꽃은 영원히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후 그 아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집 앞에 나가니 그 아이는 내 손에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병 안에는 정성스레 말린 꽃들이 차곡차곡 쌓여 작은 화원을 이루고 있었다. 내가 준 라넌큘러스였다. 집으로 돌아와 유리병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말린 꽃들이 아니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받은 것은 사라지지 않을, 영원한 봄이었다. 


흐드러진 벚꽃나무 사이를 걷는다. 사실 이번 겨울에도 달라진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앉아있고, 부모님은 여전히 떠다니고 있으며, 그 아이는 또 누군가에게 봄을 선물하겠지. 그래도 내가 이번 겨울을 보내면서 느낀 건 기다림이었다. 무심한 바위처럼 가만히 앉아 계절을 지켜보는 것보다 한 번쯤은 배고픈 나비처럼 찾아 나서는 것도 좋다는. 여름엔 매미, 가을은 잠자리, 겨울엔 하얀 눈을 기다리는 강아지가 되어 계절을 맞이하는 게 어떨까. 내가 기다린 만큼 계절도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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