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4일
일어나자마자 달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콜롬비아 산 안드레스에서 뜀박질했던 시간이 꽤나 좋았기에. 안 따라올 것 처럼 말하던 카멜도 한 10분 정도 지나고 나를 따라 뛰겠다고 말했다. 한시간 같이 느껴졌던 삼십분을 달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바로 점심을 먹기 위해 나왔다. 시장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한 관계로 길거리에서 파는 세비체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엄청나게 맛있었다. 그리고 이건 콜롬비아를 떠나기 전, 남미대륙을 떠나기 전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카멜은 내게 여러번 말했다. 나와 여행한 반나절의 시간이 너무 좋았다고. 그러면서 뉴욕여행을 좀 더 미뤄보는 건 어떻느냐 말했다. 아마 카멜을 여행 초중반에 만났다면 나는 당연히 뉴욕 여행을 뒤로 미뤘겠지만 이번은 달랐다.
"가야 돼. 이제 한국이 가고 싶어."
이렇게 말했더니 뉴욕행 비행기를 끊어주겠다던 카멜은 결국 아시아행 비행기도 끊어주겠다고 말했다. 자기랑 10일만 더 같이 여행하다 가자고 말이다. 그 친구가 남미에 언제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한 그 반나절의 시간이 꽤나 강하게 남았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나도 너무 좋았다. 그 시간들이. 그냥 아쉽고 재밌고.
"돈 낭비하지마"
이제는 더이상의 연기되는 여행보다는 한국이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그래 너가 옳아"
라며 아쉽고 조금은 다운된 어투로 말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정말 그곳에서 더 여행하고 싶었다. 나도 너무 아쉬웠지만 그 뒤의 약속을 모두 깨도 사실 상관이 없었겠지만 이번은 왠지 돌아가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쉽지만 기약없을 다음을 약속했다. 간절하다면 정말 그립다면 모든 인연이 그렇듯 언젠가 또 만나게 되겠지.
돌아가기 전까지 카멜과 올드시티를 돌아다녔다. 택시탈 때까지 내 옆에 있어주고 꼭 안어주던 카멜과 헤어졌다. 그리고 밤9시, 뉴욕에 도착했다. 드디어, 드디어! 뉴욕이다. 생각에도 없던 뉴욕을 멕시코에서 만난 콜롬비아 그 친구 덕에 여행한다. (물론 그 친구는 없지만) 화려하다. 이제 카우치서핑에서 만나기로 했던 에녹을 만날 시간이다.
이제 많은 사람을 스치고 인연이 되어도 깊게 남는 기억의 개수가 점점 줄어든다. 무뎌지는 건지 자극적인 걸 찾아가는 건지. 사람이든 사랑이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에녹은 그랬다. 3월에도 그랬듯 10월에도 그랬듯 미국 여행이라면 칠색팔색하는 나다. 그런 미국의 이미지를 아주 재미있게 바꿔준 친구니까 (참고로 에녹은 아르헨티나 사람인데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나는 모두에게 고맙다. 특히 멕시코에서 만난 그 친구 알바로에게 참 고마웠다. 고맙다 이놈아. 덕분에 3일뿐인 뉴욕 여행이지만 잘 즐기다 갈 수 있을 거 같다.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학한 대학교는 나에게 대단한 문제가 되었다. 당시 공무원 준비를 포기하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던 내가 사회로 뛰어드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런 스펙도 학력도 없는 나에게 있어 실제로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을 선택했다. 사회로 뛰어들기에 겁이 났던 내게 대학은 하나의 차선책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금전적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은 나머지 대학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살아가는 법을 먼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금전적 지원이 원활하지 못한 것은 몇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그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였다. 아마 욕심이 많고 바라는 게 많아서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당시 대학교 자취비용 조차 감당할 돈도 없었던 나는 겁이 났다. 무서웠다. 앞으로의 삶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돈에 절절 메어 사는 이 차라리 돈을 벌자고 결심한 거다. 누구나 그렇듯 그 안에는 분명 더 나은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원대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려운 곳이었다. 그렇게 삼 년이라는 시간을 길 위에서 전전하고 나서야 배움의 소중함을 알았고 학생이라는 신분이 얼마나 행복한 지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재적을 무릅쓰고 재입학에 도전했다. 악순환의 반복은 스스로가 자처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상황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차선책에 기대는 선택도 아니었다. 더 비장한 각오였다. 마치 삼 년 동안 칼을 갈고 전장에 나서는 사람처럼 나를 단단히 만든 후 내린 선택이었다. 겁은 났지만 두렵지 않았다. 해낼 수 있다는 뜻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