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그의 친구들이 위로의 술잔을 따라주겠다며 저녁 늦은 시간, 평소에 자주 가던 '종로 닭 한 마리'로 그를 불러내었다. 집에서 혼자 소주나 까려던 그였지만, 이런 날에 자취방에서 쓸쓸히 술잔을 비웠다간 괜히 오늘 헤어진 여자친구에게 전화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에 억지로 집 밖을 나서기로 했다.
헤어진 상황에 불필요하게 흑역사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핸드폰에 찍힌 발신 및 통화 내역을 봤다가는 쪽팔림에 일주일은 외출을 금하지 않을까 하는 별 영양가 없는 상상에 실소가 터졌다.
"갑자기 왜 혼자 쪼개고 그래?" 옆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지낸 지 7년 가까이 된,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의 대학교 동기. 아마 이 친구만큼 그의 연애사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떻게 만나서, 사귀게 됐는지, 그리고 중간중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친구였다.
"아냐. 그냥 갑자기 웃긴 생각이 나서."
"오늘 헤어지더니 맛이 갔나..."
막상 헤어지고 나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는 헤어지고서 하루종일 울면서 식음을 전폐하고,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던데, 이별이 뭐 대수라고 그렇게들 오버를 했던 것인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개운한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친구들이랑 술 먹는다고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줘야 했을 테지만, 그럴 필요도 없이 온전히 이 술자리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 퍽 어색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쩌다 헤어진 건데? 엊그제만 해도 여자친구랑 어디 가네 마네 했잖아."
"그냥... 나도 잘 모르겠다. 헤어질 만한 시간이 됐나 봐."
"오늘 싸우기라도 한겨?"
"여자친구도 나한테 기대했던 게 있었고, 나도 여자친구한테 기대했던 게 있었나 봐. 근데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당장 극적으로 변화하기에는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것 같고."
"좀 알아먹기 쉽게 말해봐. 우리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아야 위로를 해주든, 같이 욕을 해주든 할 거 아녀."
"일단 한 잔 하고 말해보자." 그는 빈 잔 가득 소주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
이틀 전, 평소처럼 아르바이트를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시시콜콜 털어놓으며, 괜히 실없는 소리도 하고, 점심에 먹었던 김치찌개가 입맛에 안 맞았다, 저녁에 바빠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등등 모든 연인들이 그렇듯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일주일 후면 여자친구의 생일이라는 사실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 그의 통장에는 십만 원이 채 남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오려면 2주는 기다려야 할 텐데, 그의 여자친구가 갖고 싶다고 말한 신발을 사주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당장 필요한 생활비로도 벅찰 지경인데, 수중에 있는 전 재산의 절반이 넘는 가격의 신발을 사는 것은 만용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말을 전하기 위해 핸드폰 자판에 손가락을 올려놓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런 사람의 생일을 온전히 축하해 줄 수 없다는 사실에 괜한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손편지와 케이크로는 채울 수 없는, 으레 생일날에 받는 남자친구에게 받는 선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잘 아는 그였기에 쉽사리 '선물 못 사줘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내 자신의 여자친구라면 이런 상황도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다.
"자기야, 나 자기 생일 선물에 다음 달에 줘도 될까...?"
"에... 갑자기?"
"나 통장이 완전 텅장이라... 다음 달에 월급 받으면 사줄게 ㅠㅠ"
"아니야... 됐어... 기대 많이 했는데.. 억지로 선물 받기는 싫어."
"기대 짓밟은 것 같아서 미안한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해주고 싶어서 그래."
"아냐, 주지 마."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기대했다'는 말이 왠지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 남자친구로서, 아니 인간이라는 하나의 객체로써, 부끄러움과 미안함에 자존심을 내려놓았지만 그마저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참하게 짓밟힌 비참함이 물 밀듯이 몰려왔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오빠, 우리 이제 그만하자. 오빠 좋은 면도 많이 있지만, 안 좋은 점이 요새 더 많이 보이는 것 같아. 생일 전에 이렇게 싸우는 것도 지치고, 힘들어. 헤어지자."
평소였다면, 울면서 미안하다고 붙잡았을 그였지만,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자존심도,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감도 모두 단 한 사람이 넝마를 만들어버렸다는 분노가 이별을 재촉했다. 그것만이 당연한 결과이며, 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그였다.
"그래서, 그러고서 헤어진 거야?" 말없이 그의 말을 듣던 친구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얼굴은 보고 헤어지자고 했지. 최소한 그게 매너고 예의라고."
"그리고 오늘 만나서 헤어지고 온 거였구먼."
"그치."
"아유, 잘 헤어졌다. 뭔 생일 선물 때문에 헤어지자 말자 하냐. 애가 그냥 어리다, 어려."
그는 말없이 소주 한 잔을 더 따라 마셨다. 또다시 밀려오는 비참함과 슬픔이 몹시도 싫었다. 이내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연애 못 하겠다."
"왜?"
"2년 반 사귀던 사람한테도 이렇게 버림받는데 앞으로 뭘 어떻게 사람을 믿고 사귀냐. 5만 원짜리 신발 하나 못 사줘서 차이는데."
"앞으로 좋은 사람 만나면 되지. 짠하자 짠."
얼마나 마셨을까. 머릿속이 알코올로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휘청거리기 바빴다. 이내 입 안 가득 메우는 토사물을 새하얀 눈 길 위에 뱉어냈다. 시뻘건, 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인가였다. 그리고 멈출 새도 없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위산과 토사물을 쉴 새 없이 토해냈다.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었다. 이럴 때 어떻게 했더라. 아, 전화. 전화해야 돼. 통화 버튼을 누르던 그는 문득 깨달았다. 전화번호부에서 지워버린 그 번호, 그 이름. 통화내역에는 저장되지 않은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만이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