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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Ko Aug 29. 2023

우리가 헤어진 진짜 이유

K의 이야기(1)

"4일째 술만 들이키는 건 알지?"

"알아. 빨리 채워. 술 식는다."

"나 헤어지고서는 허구한 날 놀리던 인간이..."


(4)

나흘의 시간이 지났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소주를 들이켰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관성적으로 소주잔에 초록 병을 기울이고 있는 그였다. 소에 한 병을 채 마시지도 못했던 그가 온 동네 친구들을 불러가며 술을 마신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와 술을 기울이던 친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헤어진 건 둘째 치고, 어떻게 만났는데?"

"그런 얘기까지 해야 되냐."

"궁금하잖아. 평생 연애하고는 담쌓던 사람이 갑자기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랑이라는 자랑은 다 하고 다녔는데."

"뭐 쌓고 싶어서 쌓았냐? 살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지."

"아니, 말해 봐. 헤어진 마당에 얘기도 못 해?"

"번호 따서 만났어."

"너가? 아니 형이?"

"안 되냐?"

그는 조용히 초록 병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2020년 1월 어느 날, 그는 아무 생각 없이 홍대입구역 근처를 어슬렁거렸다. 이렇다 할 이유가 있어서 그곳을 배회했던 것은 아니었다. 회사와 집을 의무적으로 오가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 그동안 잊고 살았던 여가생활이라는 것을 즐기기 위해 서울 방방곡곡을 유랑하던 그였다. 유명하다는 전시회, 연일 매진이라는 대학로 연극, 줄 서서 먹는다는 유명 맛집까지 발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시간을 쪼개서라도 방문 도장을 찍었다. 근 26년 만에 얻는 경제적 자유와 여가생활의 자유를 DNA 구조 가닥가닥에 촘촘히 새겨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 그는 지긋지긋했던 회사 생활을 마무리했다. 쳇바퀴처럼, 무한히 반복되는 업무, 8시까지 이어지는 잔업, 주말에도 계속되는 특근에 몸 성할 날이 없었다. 갖은 잔병치레와 애완동물처럼 달고 다니는 역류성 식도염에 그의 몸과 장기들은 쉴 새 없이 파업을 외쳤다. 정말 이렇게 살다가제 명에 못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퇴사와(그의 말을 빌리자면 해방) 동시에 국가에서 150만 원씩 쥐어주는 실업급여와 회사에서 쥐어준 몇 푼 안 되는 퇴직금으로 그토록 고대하던 한량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던 그는 문득 살면서 '홍대'라는 곳을 제대로 가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20대 초반, 친구들 손에 이끌려 여기가 홍대에서 제일 잘 나간다며 '그린라이트'라는 클럽 비슷한 곳을 갔던 것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기억이 없는 그였다. 그마저도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EDM 음악과 누가 누구인지 분간도 잘 가지 않는 인파에 휩쓸려 3시간 동안 정신적인 고문을 당한 끝에 근처 피시방에서 처량하게 날밤을 샜던 기억밖에 없었다.


누군가는 홍대입구역 9번 출구를 제 집 현관보다도 많이 들락날락했을 테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마계의 초입, 던전의 입구와도 같았다.  날은 저녁에도 역 입구에는 다양한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를, 조금은 헐벗은 듯한 복장의 사람부터 피곤에 찌든 평범한 직장인 혹은 대학생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금발의 외국인들까지. 홍대입구역은 그날, 의도치 않게도 작은 세계화를 이뤄내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부산스럽게 이곳저곳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늘어선 빨간 천막의 포장마차, 분주히 돌아가는 입간판, 삼삼오오 술집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일행들, 발걸음에 차이는 먹다 버린 나무꼬치 쪼가리들, 수 십 명이 피우고 내던진 담배꽁초와 바닥 곳곳에 내뱉어진 걸쭉한 체액이 그를 환영해 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혼란을 무기 삼아 골목 곳곳에서 너도나도 기타를 메고, 최대 출력의 마이크 앰프 소리로 무장한 버스킹이 이어졌다. 그는 삽시간에 알 수 없는 피로함과 무료함에 휩싸였다. 정당한 목적의식 없이 당도한 이곳에서 그에게 보장된 복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발걸음을 재촉하며 자신 주변의 어지러운 수라장에 벗어나고자 했다. 골목 하나를 벗어나자 꽤나 한적한 4차선 도로가 보였다. 피폐해진 정신을 이끌고 도로를 따라 조금이라도 저곳에서 멀어지기 위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불이 꺼진 옷가게를 지나, 국적 불명의 외국 음식점에 다다를 때쯤 저 멀리서 한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그때 번호를 땄다?"

"그치."

"진짜 식상하네."

"다들 그렇게 하잖아."

"아니, 원래 그런 거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어서 번호를 땄다는 거야?"

"그냥, 뭐... 나도 모르게?"

"참나. 그래서 여자친구가, 아니 전 여친이 번호는 바로 줬어?"

"그랬겠냐?"

그는 다시 소주잔에 초록 병을 갖다 댔다. 그리고는 마저 못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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