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까지 남은 날이 두 자리대로 바뀌면서부터 시간은 표적지를 향한 총알과 같이 빠르게 지나갔다. 앞자리 수가 바뀔수록 긴장감은 배가 되어 갔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지난 백 일제 행사에서의 그 분위기와 열의는 점차 옅어져 갔고 어느 순간부턴가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만약 수능이 끝난다면 무엇을 할지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나의 삶의 대부분을 수능 하나를 목표로 살아왔는데 이 고비를 넘고 나면 과연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적어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매일 밤 침대에 눕기 전까지 손에서 펜을 놓지 못하는 지금의 삶보단 훨씬 편하고 여유로울 것이다. 결전의 날 이후 무엇을 할 지에 대해 진중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던 때가 바로 지금, 수능 보름 전 즈음부터였다.
D-Day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우리 모두는 가슴속에 불안감과 초조함을 항상 품고 있었지만 머리 한 구석은 다른 생각으로 인해 잔뜩 들떠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보름 후에 이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다. 수능만 끝난다면 우리는 그동안 참아왔던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TV보기,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컴퓨터 게임하기,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 몰아보기, 인기 있는 영화 시리즈 정주행 하기,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하기, 꿈에 그리던 이상형과 연애하기 등. 그동안 바빠서 학업상의 이유로 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고3들은 긴장감과 동시에 기대감에 잔뜩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항상 지쳐있는 표정과 굼뜬 행동으로 어기적 어기적 움직이던 수험생들 중 몇몇이 그날만큼은 활기찬 모습으로 교실 뒤편에 모여있었다. 모두가 들뜬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바로 한국지리 교재. 우리들은 한국지리 교재에 나와있는 지도들 보며 수능이 끝나고 어디로 여행을 다닐지 한창 논의 중이었다. 사회탐구영역으로 한국지리를 선택한 친구들의 전문지식을 참고해가며 말이다.
'여행'이라는 개념 자체가 우리 모두에게 까마득한 과거의 추억으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여행 계획을 짜는 것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각자가 가고 싶었던 지역을 말하고 이를 연결 짓는 루트를 짜며 각 지역에서 무엇을 할지, 어떤 것을 먹을지, 어디서 잘 지를 정한다. 교실 뒤편에서 수능 이후의 낙원을 꿈꾸던 우리는 아주 잠깐이나마 수능을 잊고 행복했다. 보름이라는 남은 시간이, 촉박하게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다려졌다.
우리는 그 날 그 자리에서 행복한 약속을 했다. 다 같이 수능에서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두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즐겁게 여행을 다녀오자는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은 약 2달 후 불완전하게 지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