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엠 저리킴 May 21. 2021

중소기업이니까 그래도 된다는 착각

시스템, 도대체 뭐시 중헌디?


2002년부터 시작된 나의 첫 사회생활은 13인의 중소기업이었다. 어느 중소기업이 그러했듯 회사는 직원에게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회사의 철학이나 비전은 물론 업무의 프로세스나 기본적인 규칙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정확히는 알려주지 못한 것이 맞겠지. 왜냐하면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그저 새로운 업무를 맡기면서 기존 행사의 자료를 주거나 인터넷 서칭을 통해 자기주도업무(?)를 하도록 종용하는 식이었다. 그때는 나도 신입 사원이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회사의 여자 대표님은 좀 깐깐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워낙 일에 대한 욕심이 많고 자기애가 많다는 것 정도가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1년 후 들어간 두 번째 회사도 당연히 14~15인의 중소기업이었고,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아는 선배님이 다니던 회사였기에 적응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으나, 회사의 시스템은 그야말로 낡고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거기서도 1년 반 만에 결국 퇴사를 하였으니 회사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문제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잠깐의 자영업을 마치고, 세 번째 들어간 중소기업은 그래도 좀 규모가 있는 80~100명의 중소기업이었다. 대우도 나쁘지 않았고, 큰 회사이다 보니 대형 프로젝트에 대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규모에 맞게 경영지원부가 업무 외적인 부분을 관리해주다 보니 어느 정도의 프로세스가 존재했고, 그 규칙과 원칙에 따라 회사가 톱니바퀴처럼 잘 돌아갔다.


단점이라면 사람이 많은 만큼 개성이 강한 고참들이 참 많았다. 고성과 폭언, 잦은 회식, 습관성 야근, 희롱, 협력사 갑질 등을 잘해야 오히려 인정을 받는 건가 싶을 정도로 만연해 있었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은 고참들도 있었지만 다수는 아니었다. 후배들도 역시 고참들에게 배운 그대로 행동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다 회사 내 한 개 본부가 자회사의 개념으로 독립을 했다. 인원은 20명. 대표님의 성향이 앞서 얘기한 그런 쪽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꺼이 함께 했다. 회사 분위기가 기존의 회사와는 다르게 화기애애하다 보니 회사는 시작부터 좋은 실적을 거두면서 소프트랜딩에 성공했다. (이 회사의 경우 현재까지도 이해관계가 얽혀있으므로 설명은 여기까지만)




13~100명 규모의 중소기업을 4군데를 전전한 결과 각 회사별로 장단점이 명확하지만 공통적인 부분이 바로 체계가 없다는 것이다. 잡플래닛의 회사 평가를 봐도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체계가 없다', '주먹구구식이다', '한두 명의 기분에 따라 분위기가 좌지우지된다'라는 평가가 거의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잡플래닛 본인의 회사 이름을 검색하면 잡플래닛 조차도 비슷한 내용의 평가가 올라와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


중소기업이니까, 대기업이 아니라서 그냥 그런 체계를 구축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그것이 면죄부가 될 수 있을까? 일단 답은 '아니오'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과 시간과 인력이 충분치 않으므로 어떠한 체계를 잡는다는 것이 사실상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된다. 그런데 체계를 만든다는 것을 상당히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하고 애초에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중소기업인데, 뭘 바래?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싫으면 대기업 가면 되지'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처음 3명으로 회사를 만들 때, 가장 먼저 한 것이 우리만의 연봉계약서를 만드는 일이었다. 인터넷에서 흔하게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그런 계약서 말고, 우리의 비전과 약속이 포함된 그런 계약서. 언제 실현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날이 온다면 정확하게 계산을 해서 인센티브와 복지와 이익 배당을 할 수 있도록 약속하는 내용을 포함했다. 물론 직원들의 의무와 할 일에 대해서도 함께 포함을 했다.


이후 직원이 7명을 거쳐 12명이 되었을 때, <rule book v1.0>을 만들어 회사의 철학과 비전, 세부적인 운영 방침에 대해서 디테일하게 정리했다. 직급 체계, 조직 체계, 인센티브 제도, 근태 및 연차 제도, 복리후생 제도, 업무 환경 관리, 복지 제도, 기타 각종 관리 체계 등으로 구성된 20페이지짜리 규정집으로 현재는 <rule book v3.0>까지 업데이트가 된 상황이다.


이것은 회사가 직원들에게 하는 자세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약속을 하는 문서이다. 최소한 회사의 경영상태가 최악으로 가지 않는 이상 꼭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은 문서이기에 한 글자 한 글자 신중하게 작성을 했다. 나중에 쉽게 변경하거나 철회하는 일이 없도록.


보고 및 결제도 최소화하였고, 모든 결제를 전자로 할 수 있는 그룹웨어도 사용 중이다. 업무 외적인 부분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 협력사 결제나 물자 구매 등은 최대한 빠르게 지원할 수 있도록 경영지원부가 최대한 업무를 팔로업하고 있다. (다수의 중소기업에서 경영지원부가 아닌 경영참견부라는 오명을 쓰고 있다)


물론 이렇게 나름 빈틈없이 준비를 한다 해도 대기업의 시스템에는 한참 모자랄 수 있다. 대기업을 다녀보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시스템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으나, 최소한 직원으로 15년을 살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직원들이 진짜 원하는 것을 선별하여 회사의 재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지원하기 위해 매일매일 고민한다.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고,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 간혹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회사의 가장 중요한 직원들이 중소기업인 우리 회사를 선택한 것에 대해 확실하게 답을 주고 싶어서이다.


까페를 운영하더라도 손님이 그 수많은 까페를 두고서 하필 왜 우리 까페에 와야 하는지 그 답을 줘야 할진대, 회사는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 우리가 직원들에게 100점짜리 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50점을 하고 있으니, 70점 정도만 하고 있어도 잘하는 거 아니냐고 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rule book 4.0>, <rule book 5.0>의 지속적인 업그레이드를 통해 100점을 향해서 끊임없이 달려 나가야 한다. 그래야 이 정글 같은 중소기업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작년에 회사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6개월간을 꿋꿋이 버티다가, 7월~9월까지 2.5개월간 유급휴직을 시행했다. 정말 죽기보다 하기 싫었지만 장기전으로 돌입한 코로나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함께 고생하고 있던 직원들에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불가피한 상황이었고, 연말/연초에 있을 큰 행사를 무사히 완수하게 되면 꼭 그 보답을 해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다행히 행사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잘 치러졌고, 회사는 결국 큰 마이너스로 마감을 했지만 그래도 조금의 인센티브를 전체 직원에게 지급했다. 그건 직원과의 약속이기 이전에 나와의 약속이었기 때문에 진심 기쁜 마음으로 지급했다.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끝까지 믿고 따라와 준 직원들에게 너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그 진심이 잘 전달이 되었길 부디 바래본다.



출처 : 잡코리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