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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누 Sep 06. 2020

그날 객석은 만석이었다

강의실 불이 꺼지고 빔프로젝터에서 빛이 나왔다

 ‘영화영상제작수업’은 여타 강의들과는 다르게 수업내용이나 평가방식에 있어 부담이 덜한 수업이었다. 평가방식은 절대평가였고 중간고사도 없었다. 대신에 학생들은 각자 한 학기 동안 영상을 만들고 종강하는 날 공개발표를 해야 했다. 발표는 가랑비가 내리던 어느 12월 아침에 이뤄졌다. 교수님이 출석부에 적힌 이름을 부르자 호명된 학생은 앞으로 나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했다. 그 모습은 흡사 법정에서 배심원들한테 최후의 변론을 펼치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막상 돌이켜보니 다들 아쉬운 점이 많은 듯했다. 발표자가 빨개진 귀를 가리고 자리로 돌아가면 강의실 불이 꺼졌고 하얀색 스크린을 향해 빔프로젝터가 강렬한 빛을 쏘았다. 그렇게 우리들의 작은 상영회는 시작이 됐다.


 배우를 고용해 극영화를 찍은 학생, 학교 곳곳에 새겨진 낙서를 모아 실험영화를 만들거나 유명 프랑스 시인 랭보의 ‘모음’이라는 시로 예술영상을 만든 학생도 있었다. 한 명은 SNS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제주도에 중고서점을 내는 모습을 촬영했다. 대부분 학생들의 결과물은 모두 상당한 수준이었고 교수님도 흡족한 표정이었다. 다들 영상제작에 관심을 가진 친구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결과물의 수준도 좋았다. 처음 영상을 만든 학생들도 있었지만 열심히 한 사람의 작품은 남달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두한테 공개망신을 당했다. 스크린에 비치는 결과물의 완성도는 창작자가 쏟아붓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열정에 비례했고 그건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기본법이었다.


 수업이 중간쯤에 다다랐을 때 한 여학생의 이름이 호명됐다.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와 학업을 병행하던 학생이었다. 영상제작수업은 그녀가 듣는 마지막 대학 수업이었다.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그녀를 향했고 우린 그녀가 어떤 변론을 펼치지 기대했다. 하지만 그녀가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저희 할아버지가 최근에 꽤 큰 수술을 겪으셨어요. 가족들 모두 할아버지한테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는 걸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모습을 영상으로 담기로 했어요.”

 차분하게 말했지만 목소리는 분명히 떨고 있었고 눈가에는 눈물이 조금씩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울음을 터트리기 전에 서둘러 자리로 돌아갔다. 잠시 후 강의실 불이 꺼졌고 빔프로젝터는 다시 한번 빛을 쏘았다.


 이전의 작품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영상에는 어떠한 기교도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그저 손녀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뿐이었다. 손녀의 카메라 안에서 할아버지는 늘 말을 아꼈다. 큰 수술 이후라서 그런지 그는 힘이 없어 보였다. 가족들 사이에 있어도 할아버지는 외로워 보였고 흐릿한 카메라 렌즈 너머로 보이는 그의 시선은 사람이 없는 곳을 향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TV소리를 배경음으로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이내 피곤했는지 그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두고 몸을 눕혔다. 베개에 머리를 베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옆에서 조용히 그 모습을 촬영하던 손녀딸은 조심스럽게 TV를 꺼버렸다. 할아버지는 잠에 들었고 영상은 그렇게 끝이 났다.


 상영회가 끝난 이후에도 그 작품은 은연중에 가끔씩 나를 찾아왔다. 벌써 그 수업을 들은 지가 1년이 넘었지만 그날 내가 들었던 목소리의 떨림만큼은 잊을 수 없다. 그건 비단 영상 속에 등장한 할아버지의 모습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이었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런 영상을 만들었던 걸까. 그녀가 그날 보여줬던 건 소중한 자신의 일부였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한테도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 그런 감정을 그녀는 생판 모르는 남들한테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마음속 한편으로 나는 그녀가 이해가 됐다. 과거의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건 결코 낯선 장면이 아니었다.


 고등학교 3학년 한국사 시간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우리들한테 선생님은 각자가 보낸 3년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셨다. 교탁에서 가장 가까운 아이부터 일어서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갔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울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을 그저 가볍게 받아들였다. 차례가 돌고 돌아 가장 끝 테이블에 앉아있던 나한테까지 왔다.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막상 내 차례가 다가오자 나는 그동안 내가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그것이 주제에 어긋나더라도 나는 그냥 말하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반 친구들한테 숨겨왔던 나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암 판정을 받은 아버지와 그 치료과정을 옆에서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했던 나의 이야기를 말이다.


 내가 그 여학생과 그녀의 작품을 잊지 못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우린 서로 한 학기 동안 단 한 번도 인사를 주고받거나 말조차 섞어보지 않은 남이었다. 그럼에도 그날 강의실에서 나는 그녀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그날 목소리를 떨고 있었니까. 나는 그녀였고 그녀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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