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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카위빙 바이 경 Oct 26. 2021

3. 황홀하고 근사한 정적

직접 마주한 완연하고 온연한 가을의 집합체

* 이번 글과 함께 추천 음악

: : Bill Evans / midnight mood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코로나19 이후로 한 번도 가지 않은 영화관에서 조조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으로부터 하루가 시작됐다. 너무 단순하게도 최근 개봉한 영화 ‘듄’에서 내가 좋아하는 배우 티모시 샬라메(Timothee Chalamet)를 보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이 가을을 제대로 느끼게 해 준 시초가 됐다. 웬 SF영화에서 뜬금없이 가을을 느꼈냐고? 영화를 보러 가기 위해 재촉하는 마음으로 대공원을 거쳐 지나왔던 과정에서 나는 그제야 진짜 가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우리 동네엔 늘 나 혼자 멋대로 칭하는 센트럴 파크가 있다. (참고로 실제 뉴욕의 센트럴파크를 안 가봐서 직접 보고 여유와 그 영광을 언젠가는 꼭 느끼고 싶다.) 그 드넓은 초원을 옆에 두고 다소 촉박하게 느껴진 영화 시작 시간 때문에 좋아하는 산책로를 바삐 거닐고 있었다. 가로수길에는 나란히 자리 잡은 나무들이 터널처럼 빽빽하게 주를 이루고 있는데 좀 걷다 보면 비로소 대공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인 초원이 보이면서 크고 작은 잎들과 바람에 일렁이는 느티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무수히 빠져나오는 걸 보게 된다. 아침 햇살에 눈이 부셔서 가려보려고 애써보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막을 수 없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 플래시처럼 이른 하루의 시작에 내게 무수한 찬사를 보내듯 이파리들 사이로 태양의 플래시가 마구 터졌다. 그런데 이제야 진짜 내가 좋아하는 가을을 마주한 것 같았다. 그것도 근사하고 황홀한 가을의 집합체로 말이다. 사실 일주일 전에 갑작스러운 한파에 너도나도 당황스럽게 겨울옷을 주섬주섬 꺼내 입어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을이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는구나 싶었다. 갑자기 다가올 겨울에 두려움을 느끼며 쏜살같이 지나가는 가을에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가을은 잠깐 찾아온 한파에도 잠시, 틈틈이 제 역할들을 충실히 다 하고 있었다. 바쁘게 걷는 와중에도 장관을 그냥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워서 뭐 하나라도 더 눈에 담아보려고 급하게 둘러보았다. 언제 단풍으로 물들까, 언제 은행잎이 흩날릴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건 그냥 나의 어리석음과 나태함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었다. 이미 잎새들의 손톱 끝은 봉숭아 물을 들이는 것처럼 자기들끼리 붉게 기분을 내고 있었고 이미 멋스럽게 가을 단장을 마친 나무들도 많았다.




사랑의 온전한 힘이, 약간의 긴장에서 비롯된 약속의 힘이 대단함을 다시 느낀다. 단지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보려고 일찍 일어나서 오랜만에 대공원을 빠르게 거닐었을 뿐인데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가을의 모습을 마주하다니. 예상외의 값진 수익이었고 감동과 함께 밀려오는 여운을 금치 못할뿐더러 기쁨이 내 주변에 쉽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다시금 알아채니 생각보다 쉽게 행복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사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가을의 매력은 너무나도 많다. 일교차가 너무 커서 옷 입는 게 모호한 것도 있지만 아침과 밤에는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서늘해서 그리 두껍지 않은 카디건이나 겉옷의 옷깃을 여미는 걸 일부러 즐긴다. 그게 누군가한테는 불만사항 일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저녁에 퇴근을 하고 살짝 쌀쌀해진 날씨에 발라드나 잔잔한 재즈 혹은 약간 딥한 팝송을 들으며 집으로 총총 발걸음을 옮기면 행복은 더할 나위 없다. 가을에 내리는 부슬비도 사랑하고 다음 날 본인이 언제 비를 퍼부었냐고 발뺌하는 것 마냥 계절의 뻔뻔함과 동시에 맑게 갠 가을 하늘도 사랑한다. 창문 사이로 살짝 느껴지는 한기에 두꺼운 이불을 폭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리는 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고.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을의 이른 아침이 무척 매력적이다. 그걸 너무 늦게 안 것만 같았다. (아님 그새 잊고 있었나 보다.) 다행히도 잠깐 시간이 괜찮아서 아쉬운 마음을 채우고자 영화를 다 보고 왔던 길로 다시 걸어갔다. 설렌 마음과 함께 내 마음속 센트럴 파크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빌 에반스의 ‘midnight mood’를 들으며 글을 썼다. 제목은 ‘midnight mood’지만 고요한 아침~점심으로 넘어가는 그 시간과 피아노의 소리맵시가 잘 어우러져 감히 내 맘대로 ‘brunch mood’로 바꾸고 싶을 지경이다.  도도하게 초원 위를 거닐던 까치의 종종걸음과 기분 좋게 통통 튀는 피아노 건반의 가벼움이 괜히 닮게 느껴진다.




다시 돌아와서, 그때  순간은 새소리와  에반스의 노래 외에는 들리지 않는 황홀하고 근사한 정적이며 내겐 행복의 순간이었다. 고작 사반세기 하고 2년밖에 살지 않은 나지만 앞으로 사랑하는 계절을 보고 느끼며 사랑의 깊이가 깊어지고 더해지고 진하게 우려지게   여정이 기대된다. 가을의 집합체를 보니 작년 이맘때쯤 썼던 말이 다시 생각난다. 찾아보니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인데 가을 아침만 되면 유독 내가 뭔가라도 깨닫는 걸까? 나의 나태함을 꼬집고 자기 검열을  글들이 공교롭게도 주로 가을에 많았다. 어찌 됐든 잠시나마 자연을 감상하니 게으름 때문에 많은  낭비하고 불필요하게 소비하고 놓치고 있는 것들이 많다고 느껴졌다.


2020년 10월 28일 인스타그램



나는 또 이렇게 애정 하는 가을을, 지나가는 계절을 분명히 아쉬워할 것이다. 그러나 시각적, 청각적으로는 아름다움을 담고 후각적으로는 가을 향을 담뿍 담으며 지나가는 이 시간을 잊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꿈을 생각하고 타협하며 사는 나의 앞으로 더 소중한 시간들을 위해서 말이다. 더불어 각자에게 기분 좋아지고 설레어하는 계절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난 시월 말 가을 아침에 자칭 센트럴파크에서 비로소 황홀하고 근사한 정적을 마주했다. 누구나 가슴속에 그런 계절이나 시간을 품은 채 생각만 해도 벅찬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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