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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emji Dec 27. 2024

베지 않는 검객

한 컷의 건축

기동전사 건담機動戦士ガンダム(1979)에서는 두 가지 인물이 대립합니다. 정치적 목표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그들의 반대편에서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공을 세우기 위해 전투에 임하는 자들은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패배하는 반면, 단지 살아남기 위해 싸움에 임하는 사람들은 혁혁한 전과를 거둡니다. 주인공 아무로 레이는 대단한 전공이란 그저 생존을 위한 투쟁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건축에서 탁월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이와 비슷한 듯합니다. 처음부터 뚜렷한 가치를 추구했다기보다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임기응변과 실패, 그리고 자기반성이 쌓여 괄목할만한 성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제3의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건축가를  검객으로 놓고 본다면, 목표나 생존을 위해 칼을 쓰는 것이 아니라 검술 그 자체를 추구하는 검객, 즉  '베지 않는 검객'이 되는 것입니다. 원피스ワンピース(1997)에 등장하는 검객 시모츠키 코시로霜月コウシロウ는 "무엇이든 벨 수 는 검객"이 있냐는 질문에 "아무것도 베지 않을 수 있는 검객은 무엇이든 벨 수 있다."라고 답합니다.


저는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谷口吉生에게서 '베지 않는 검객'의 모습을 봅니다. 일체의 대외활동과 경쟁을 피하고 완벽한 작품에만 매진하는 모습, 건축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모습입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돋보이려 하는 과장이나 작가적 치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건축요소는 자연스럽게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놓여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 전체를 아우르는 그리드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렬되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자연스러움을 완벽한 질서가 통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과 물을 하나로 만들듯, 상반되는 성격의 것들을 일체화시키는 엄청난 자제력과 완급조절입니다. 이것이 그의 작품에서 전율을 느끼도록 하며, 역설적으로 다른 작가의 작품과 차별되도록 만듭니다


이쯤에서 검객 시모츠키 코시로의 다른 말을 떠올려봅니다.


"최강의 검이란 베고 싶은 것만 베는 힘. 닿는 것모두 상처 입히는 검은 검이 아니에요."


건축가 다니구치 요시오가 지난 12월 16일 타계하였다는 소식입니다. 늦었습니다만 그의 명복을 빕니다.


The Gallery of Horyuji Treasures / Taniguchi Yosh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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