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답사를 위해 일본을 방문하게 되면 볼 만한 전시가 있는지 사전에 반드시 확인합니다. 특히 도쿄에서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좋은 전시가 자주 열리기 때문에 건물을 관찰하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전시를 관람하려고 합니다.
2017년 동경 국립 근대미술관에서는 ‘일본의 주택 : 1945년 이후의 건축과 삶 The Japanese House : Architecture and Life after 1945’의 제목의 대규모의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최근의 일본의 건축, 특히 주택설계에서는 괄목할만한 발전이 이루지고 있는데, 본 전시는 이러한 변화의 시초가 수십 년 전에 놓여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역사에 맞닥뜨린 삶에서 요구되는 시대정신, 여기에 부응하기 위한 건축가들의 노력과 시행착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단련되어 단단해진 건축문화의 기초.
1953년, 일본 근대건축의 거장인 건축가 단게 겐조Tange Kenzo는 독일의 건축가 미이스 반 데 로에Mies van der Rohe의 근대건축이론을 받아들여 당시 일본 건축의 전환점이 되었던 작품인 자신의 집, 단게 하우스Tange House 를 목구조로 설계했습니다. 미이스 반 데 로에는 철골구조를 주로 사용했지만 단게겐조는 철골구조와 결구방식이 유사한 일본의 중목구조(목조로 기둥과 보를 만들어 구성하는 구조)로 건물을 지어 현대성과 일본 성을 접목시켰습니다. 본 전시에서는 일본의 목구조를 근대적 공간 개념으로 해석한 또 다른 건축가인 기요시 세이케 Kiyoshi Seike 가 단게 하우스와 같은 해에 설계한 '사이토 교수의 집 The House of Prof. K Saito'이 실물 크기로 재현되어 공간체험이 가능했습니다.여기서 일본의 목조구법이 근대건축이론과 훌륭하게 접목되어 당대 일본 건축의 주류를 이루었음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은 문화의 산출물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새로운 문화를 발생시키는 촉진제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겐조 단게는 Kenzo Tange 는 자신의 집에 사회 각계의 인사들을 초대하여 교류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근대적인 삶이 어떠한 것인지 대외적으로 예증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며, 근대건축의 이념은 경험의 형식으로 자연스럽게 사회로 전파되었습니다. 단게 하우스의 전시부스에 전시된 여러 장의 사진 중 이 집의 의미를 보여주는 주목할 만한 사진 하나. 건물의 그림자가 반쯤 깔린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 동네 아이들은 1층의 필로티 공간에서 자유롭게 놀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문화는 그렇게 삶에 녹아들어 주변으로 퍼져갔습니다.
20세기 후반, 일본 건축에서의 새로운 시도는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소수의 건축가뿐 아니라 창조의 의지를 가진 다수의 건축가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전환점이 될 만한 주요 작품들을 속속 발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시간과 공간을 예민하게 살피고, 그곳에 필요한 무엇인가를 제안하고, 반응을 검토하고, 스스로를 비평한 후 다음 단계로 나아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작업에는 현실인식, 실험과 비평 그리고 대안의 제시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13개로 구성된 소 주제가 그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일본 성 2. 프로토타입과 대량생산 3. 거친 콘크리트 4. 예술로서의 주택 5. 폐쇄에서 개방으로 6. 유희성 7. 삶의 이콜로지 8.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9. 탈시장경제 10. 가벼움 11. 감성적 공간 12. 마치야 : 마을을 구성하는 집 13. 틈의 재구축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시기는 1970년대의 유희적 건축의 시대였습니다. 1960년대 시작된 이상과 변혁을 위한 정치투쟁은 점차 체념의 단계로 접어들었고, 새로운 공공 공간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였던 1970년 오사카 만국 박람회는 정치적 엔터테인먼트 행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건축가들은 꿈은 꿈에 불과하다는 일종의 체념의 상태, 또는 현실과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고립시키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때 계획된 주택들은 폐쇄되고 내부로 침잠되는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기의 일본 건축의 모습이 최근 십수 년간의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진보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시기를 역사의 공백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든, 역사의 기로 앞에서 주저앉든 또는 퇴보하든, 그 사실이 있는 그대로 기록될 뿐입니다. 멈춰서 있는 듯한 지금의 한국 건축의 현재 모습은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요.
우리의 건축이 사회적 요구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비판 없이 수용하는 하나의 축과 사회 현실과 유리된 채 지극히 개인 중심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어 사회적 상황을 반추한 건축적 시도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미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5년에 달하는 정규 건축교육과정의 의미는 어디에 있을까요.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같은 무게는 아닐지라도, 학교에서 배웠던 기본 자세로 삶을 담는 건축을 대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의 건축학부시절 2학년 필독서는 유진 라스킨 Eugene Raskin이 쓴 건축과 인간 Architecture and People이었습니다. 최근 새로운 주제라 일컬어지고 있는 ‘인문학적 건축’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건축의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가치가 소거된 껍데기에 불과한 건축 작업을 해 왔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미국의 문화 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 Fredric Jameson은 문학 작품 하나를 단독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반대하고, 그 대신 작가의 삶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총체 검토해야만 진정한 작품 분석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명의 작가가 스스로를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단독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사회의 일부로서 유기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