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리나 May 14. 2023

깨진 접시로 알게 된 사랑

feat. 사랑으로 단단해지다


'쨍그랑!'


황금빛 테두리를 멋들어지게 둘러싼 새하얗고 커다란 플레이팅 접시가 거실 바닥에 자잘하게 널브러졌다.

오전 6시, 싱크대에서 남편이 닦아 놓은 접시를 정리하던 중 맨 위에 걸 터 있던 큰 접시가 미끄러진 것이다.

접시를 놓친 내 시선은 접시 조각에 고정되었다.

접시가 깨지는 동시에 내 추억과 마음도 산산조각이 나는 듯 아렸다.


'하아... 이 큰 접시가 미끄러지는 것도 못 잡아? 니가 그렇게 아끼는 건데!'


나 자신이 한심했다.

내 눈엔 이 접시가 단순한 접시 나부랭이로 보이지 않았기에.

널따란 접시 안에는 우리 가족이 웃고 재잘대며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은 저녁 식사 시간이 스며들어 있다.

남편이 부친 부침개를 먹으며 감탄하고, 도란거렸던 장면에 '쩍'하고 금이 가는 것만 같았다.


주섬주섬 깨진 조각을 집어 드는데 내 안에 여러 감정이 서로 앞다투어 나오겠다며 투닥거렸다.

분노, 슬픔, 속상함, 원망, 아쉬움, 두려움 그리고 불안.

고작 접시 하나 깨진 거 가지고 왜 이러는 걸까?

남이 보면 이상하다 싶을 테다.

접시를 다 치운 후 식탁 앞에 앉아 아침 성경을 읽으려는데 머리가 꽉 닫혔다.

그러다 별것 아닌 실수 하나로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전히...여전히 이런 모습이 남아있는 나를 보니 속이 시끌거렸다.



"더러운 년!"
"아야!"



아빠가 일곱 살인 내 머리통을 세게 쥐어박았다.

맞은 왼쪽 머리통을 비벼대고 있는 내가 보인다.

자고 일어나서 잠자리에서 놀다가 코딱지를 후빈 걸 슬그머니 이불에 묻히는 걸 목격한 아빠가 내 머리를 때린 일이었다.

까마득한 옛일인데도 기억 속에 선명하다.


아빠에게 묻고 싶다.

그게 어린 딸의 머리를 때릴 정도로 잘못한 일인지.

여덟 살 때 갑자기 잠자리 독립을 하라며 달랑 나 혼자 자게 한 첫날밤, 시커먼 바다 한가운데 혼자 동동 떠 있는 것 같아서 고모 방으로 몰래 가서 잤더니 왜 혼자 못 자냐며 회초리를 때렸어야 했는지.

중, 고등학교 때 영어를 만점 맞아도 쳐다보지 않고 기초가 부족했던 수학 점수만 꼬집어가며 "한심하다 한심해!"라고 타박했어야 했는지.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 년이 넘게 딸을 외면했어야 했는지.

묻고 싶다, 꼭 그랬어야 했는지.


소름 돋게도 아빠가 평생 날 키우며 한 행동은 나에게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작은 실수에도 나 자신을 몰아붙이고 질책하는 모습으로.

내 감정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니 그때가 보였고 이내 뜨거운 무엇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눈앞이 뿌예졌다.

많이 나아졌다고, 이제는 거의 치유되었다고 여겼는데 아직도 그 몹쓸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날 절망케 했다.

그렇게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한참을 흐느꼈다.


'괜찮아, 아직 남아있을 수 있어,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나한테 그렇게 박하게 굴지 않아도 돼.
난 내 자식들한테 안 그러니까 그것만으로도 이미 잘하고 있는 거야.'


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날 토닥였다.

그리고 기도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도와달라고.

좀 있으면 아이가 깰 텐데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서둘러 눈물을 훔쳤다.

엄마라고 늘 밝고 씩씩한 모습만 보일 수는 없지만, 접시 깨고 속상해서 운다는 말을 아이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사이 남편이 퇴근해서 왔고, 나를 흘낏 쳐다본다.

들키고 싶지 않아 그가 오기 전에 조깅을 나가려고 했는데 어그러졌다.

두세 시간 뒤, 남편은 나에게 그 접시가 어떤 의미인데 이렇게 기분이 안 좋냐고 물었다.


"접시가 깨지면서 내 감정도, 우리 가족 추억도 다 산산조각이 나 버린 것 같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텐데 남편은 진득하니 들어주었다

그러더니 양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말했다.


"이리 와 봐. 요즘 힘들었지.
사랑해..."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는 온몸으로, 언어로 날 꼭 감싸주었다.

남편 품에 안겨 울고 나니 몸도, 마음도 따스해졌다.

고마웠다, 그에게.


한참을 울고서 코를 팽하고 풀었다.

날 바라보는 남편과 아들을 향해 퉁퉁 부은 눈으로 답장의 미소를 날렸다.

그리고는 깨져버린 접시를 대신해 줄 새 접시를 주문했다.

이젠 접시를 깨뜨려도 아주 잠시만 슬플 것 같다.


- The End

매거진의 이전글 슬픔 만끽하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