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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눕피 Mar 10. 2024

그때의 나

블로그 시작점 회상기 그러나 안물안궁.



첫 직장을 관두고 백수가 된 건 2018년 10월 11일의 일이다.


그때 나는 서른을 2개월 앞두고 있었는데, 한국의 나이 규범 때문에 무척 막막하고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생각하니까 막막한 대로 또 희망이 보여 좋았다.


괜찮겠지?





대책 없이 튀어나왔기에 할 일이 없는 건 당연한데, 하고 싶은 게 없다는 건 정말 큰 문제였다.


가뜩이나 조용한 성격인 데다, 서른이 되어도 사람은 역시 잘 안 변하는 모양인지,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나를 잘 팔 자신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이 나한테 서프라이즈로 할 일을 턱 하고 줄 턱도 없어 보여서, 내가 나한테 숙제를 줘야겠다 생각하고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했다.


주변에서 브런치라는 괜찮은 글쓰기 플랫폼이 있다고 추천하길래 몇 개의 글을 모아 작가 신청을 했다.





그땐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하듯이 교보문고에 들러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뽑아 들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어든 어떤 실용서의 몇 마디가 나를 크게 움직였다.


정확한 문장은 생각이 안 나지만, <혼자 공부하고 혼자 생각하면 혼자 성장하지만, 같이 공부하고 같이 생각하면 같이 성장한다>라는 말이었다.


블로그를 더 열심히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18년 10월 17일, 브런치 작가가 됐다. 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시간은 많았지만, 블로그만 할 순 없었고, 돈도 벌어야 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 대기업의 공개 채용에 지원했다. 왜인지 모르게 자꾸만 올라갔다. 최종 면접 자리에는 나 말고 2명이 더 있었다. 여자 하나, 남자 하나. 우리는 각자 준비한 PT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정말 임원 같이 생긴 진짜 임원 한 분이 불쑥 내게 좋아하는 게 뚜렷하신 분 같은데,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잘 지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언제나 사람들과 두루 잘 지내는 편이었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사람들과 대체로 잘 어울리며 지내지만,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라면 굳이 너스레를 떨진 않았을 것이다.


12월에는 제한된 선발 인원으로 함께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는 문자가 왔다.


그때 조금 더 담백하게 대답했다면 결과가 어땠을까? 물론 담백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그해 겨울엔 미국에서 사촌 동생이 놀러 와서 하루 종일 붙어 있었다. 다 큰 남자 둘이 좁은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지지리 궁상을 떨었다. 새벽에는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현지인의 언어 감각을 강제로 빌려 랩 가사와 시트콤의 대사를 의역했고, 동생과 친구들의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





그러다가 한 번씩 죄책감이 밀려오면 유명인들의 대학 졸업 축사 영상을 틀어놓고 서른 살의 한심한 나를 가까스로 위로했다.


들을 때마다 뜨끔해 죽겠는 스티브 잡스의 연설은 전문을 외울 지경이었고, 조앤 K 롤링의 어떤 말은 들을 때마다 따스한 위로와 감동을 주었다.





그녀는 <인생이란 게 성취나 이득의 체크리스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눈물이 다 나는군.


말로 위로받아 본 사람은 말의 힘을 알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반대로 말로 자꾸만 상처를 주는 사람은 말로 위로를 받아보지 못한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도 생각한다.





과정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는 자세와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이 두 가지만 완벽히 갖추면 <후회>를 최소화하면서 잘 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우면 이러고 노냥 추억 팔이나 하며 애잔하게 살진 않겠지 싶다.


첫 회사를 관두고 마땅히 할 것도 없던 주제에 블로그마저도 시작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어떤 삶을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엄청 궁금하다.


나는 망상을 즐기는 인프피이지만, 가끔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블로그 없는 삶이다. 그거 가능하냐구요?





스물아홉에 브런치를 시작해 올해 서른다섯이 됐다. 그리고 해마다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나는 복에 겨운 양반인 것이다.


작년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사람이 올해엔 나의 인생 속으로 쑥 들어오는 것, 블로그 운영의 진정한 재미와 가치는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기대기대!





조회수로 감히 미뤄보건대 이 블로그에 정성껏 댓글을 달아주시거나 브런치의 제안 기능을 통해 소통 메일을 보내주시는 독자님들의 비율은 대충 5% 내외일 것 같다.


하지만 나머지 95%의 독자님들이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계신 분들인지 내가 전혀 모른다는 사실, 그 사실이 나를 더욱 흥분하게 만든다. 두근두근!


잘들 지내시죠? 언제 연락 주실 겁니까? 쩝.


사실 저는 부끄러움이 좀 많아서 그냥 조용히 읽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무한히 감사드린답니다. 쩝.


아무튼 저는 변함없이 한 30년 더 달려보겠습니다. 시대가 바뀌어 플랫폼이 바뀌더라도 다시 한번 꼭 찾아와 주세요.


늘 감사드립니다.


스눕피 배상.



[함께 들으면 좋은 노래]

"길어진 내 그리움에 힘겨운 나였지만, 네 맘을 내게 주었으니, 이미 넌 고마운 사람, 그걸로 이제 나는 됐어."



[함께 읽으면 좋은 포스트]

https://brunch.co.kr/@0to1hunnit/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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