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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K May 07. 2019

분열과 통합

블랙스완(2012)

왜 감독은 한 무용수가 두 가지 상반된 배역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에서 모티브를 찾았으며, 인간의 양면성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백조와 흑조”로 제목을 부치지 않고 “‘흑조”라고만 했을까?

악의 상징인 “흑조”,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탐하면 파멸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가.


#1. 주인공 니나는 어떤 사람인가? 


'니나'는 여린 열두 살 소녀 같다. 발레단장은 4년 전부터 쭉 지켜봐 왔기에 그녀가 백조 오데뜨 역할은 잘하리라 믿지만, 사악한 흑조 오닐의 역할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거라고 한다.

그녀는 <순응적인 어린이 자아(Adapt Child)>로 가득 차 있고 본능을 지나치게 억압하여 단장의 말처럼 “통나무 같아서 안고 싶지 않은” 성적 매력이 없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단장은 지나치게 본능을 억압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위험한 훈련을 시킨다.


위험한 훈련을 시키는 단장


#2. ‘니나의 엄마는 어떤 사람인가?

 

‘니나’의 엄마는 3류 발레리나로 지내다가 28살에 ‘니나’를 임신해 발레를 그만둔다. 별다른 외적활동도 없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흔한 외할머니와 통화도 없다. 외부관계를 완전히 단절한 채 은둔생활을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안테나는 ‘니나’에게 초집중해 있으며, 침울하며 어둡다.

외동딸이 12살에서 성장을 멈추길 바라는 듯 매 시간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는 과잉보호를 하면서 스물 살이 훌쩍 넘은 그녀 방을 온통 핑크색으로 도배하며 한방 가득 곰인형들로 가득 채우면서 그렇게 자신의 인생은 지우개로 다 지우고 오롯이 딸만 바라보며 살아간다.

 

자신의 인생은 없이 딸의 인생을 사는 니나의 모


‘니나’는 자기 전에 큰 몽둥이를 방문에 걸어놓고 잔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함일까?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영향일 수도 있고 엄마의 집착으로부터의 보호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니나’의 엄마는 희생적이고 모든 것을 다 주는 것 같지만, 그녀의 정신은 건강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3류 수준이었다는 것을 감추려 하고 세월이 한참 지났지만 받아들이지 못한다. “딸, 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꿈을 포기했다”는 듯이 압박을 한다. 아침식사에도 자몽 반개만 먹는 딸에게 엄청난 칼로리 덩어리인 케이크를 사오고, 많은 양을 먹으라고 강요한다. 딸이 거부를 하자 거부당한 것에 대해서 분노를 못 참으며 극단적으로 버리겠다고 협박한다.

단 한 장면이었지만 엄마의 미성숙함과 평소에 딸에게 무언의 압박감을 주고 딸은 자신의 본심과 다르게 엄마에게 맞추는 패턴이 형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폐쇄된 대인관계와 자기주장을 표현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성장하면서 건강한 인성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3. ‘니나에게 흑조가 없는 이유는? 


‘니나’에게 엄마가 모르는 사생활은 전혀 없으며 엄마가 짜놓은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녀는 물론 환상이지만 그런 모에게서 해방되기 위해서 엄마가 보는 앞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성행위를 한다. 그러고 외친다. “난 더 이상 열 두살 소녀가 아니고 사생활이 있어요.”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유들(반항, 순응적인 자아의 억압에서의 탈출, 자기 속의 흑조 발견)로서 ‘니나’는 본능에 충실하기로 마음먹는다.


“성을 느낀 다는 것”, 누구나 사춘기의 시작은 성호르몬의 활발한 작용 덕택에 성욕을 느끼면서 출발한다.

그렇지만 ‘니나’는 엄마에게 사랑받고 수용받기 위해 또 지금껏 희생한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서 12살 소녀에서 성장이 멈추어야만 했다. 그래서 여전히 엄마 말 잘 듣고 혼자서 못하기 때문에 엄마가 일일이 도와줘야 하는 어린 딸로 남기 위해서 성장을 거부해야만 했던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본능을 계속 거부했고 심약한 “아이 같은 어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거부한 흑조를 스스로 끄집어내야 한다. 단단하게 봉쇄한 철갑자물쇠를 풀어야 하고 뒤늦은 나이에 사춘기를 겪는 장면에서도 엄마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성욕을 느끼는 것은 다 큰 어른이라도 죄책감이 생길 수 있다. 묘하게 죄책감을 가지게 되는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 그 장면도 실제인지 만들어 낸 환상인지는 알 수 없다.


#4. 백조, 흑조를 열망하다. 


자신과 전혀 다른 여성 ‘릴리’.  그녀는 타고난 천재발레리나다.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지만 카리스마와 자유로움이 있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가능하다. 자몽 반개로 아침을 때우는 ‘니나’와 달리 한밤중에 빅사이즈 햄버거를 자유롭게 먹는다. 술과 약물까지 남자들과 어울리는 것에도 스스럼이 없다. 모든 것을 규제하고 틀 속에서 갇혀 사는 ‘니나’에게 ‘릴리’는 완전히 새로운 신세계다.

불에 뛰어 드는 불나방처럼 그녀에게 다가가고 그녀의 삶과 생활방식을 흉내 낸다.

<니나>에게 없는 것들이 있는 자유로운 <릴리>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잠자는 몇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욕구를 절제한 체 연습, 연습, 또 연습해야 한다. 재능은 없지만 죽어라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에게 타고난 재능을 가진 사람은 동경과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다. 게다가 단장의 인정, “저 사람처럼 표현하고 되어라”는 말은 ‘니나’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가진 ‘릴리’와의 성적환상에서 “참, 착해”라는 엄마의 환청은 또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든다. 집 안에서도 그 환청은 들렸었는데, 아마도 그건 평생 ‘니나’의 성장과정에서 옥죄어온 대사일 것이다. 엄마에게 늘 들었던 “참 착해”. 이러한 억압들의 티끌들이 오랜 세월동안 불어나서 분열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 고통이 자신의 오른 쪽 등에서 검은 털(흑조: 본능을 상징하는)이 돋아나는 환상을 보게 하고 ‘니나’는 필사적으로 털을 뽑고 계속 생채기를 낸다. 환상상태가 아닐 때는 마치 누군가에게 당한 흔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스스로의 환상이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마치 자신 속의 “흑조”를 필사적으로 억압하는 상징으로 보인다. 완벽한 “흑조”가 되고 싶어 몸부림치는 그녀는 사실은 자기 속의 “흑조”를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슬프다.


#5. 과연 <좋은 것의 합>은 완벽인가? 


“흑조”를 완벽히 표현하길 원하는 ‘니나’는 그녀에게 없는 “흑조”를 소화하기 위해서 주변인들의 장점을 모으기 시작한다.화려한 동경대상이었던 ‘베스’의 물건을 몰래 훔쳐 와서 숨긴다.


이런 행위들은 부적처럼 간직하고 있으면  사람의 행운이 내게도 올 것이라는 희망과 위안을 안겨준다.

그래서 지금도 아들을 꼭 낳아야만 하는 며느리는 아들 잘 낳은 다른 여성의 속옷을 얻어서 품고다니고, 짝사랑하는 사람의 소지품을 몰래 훔쳐 지니기도 하고, 동경하는 연예인의 사진을 가져와서 똑같이 성형해달라고 요구한다. ‘베스’의 물건을 미신처럼 품고 지니며, ‘릴리’를 흉내내면서 스스로 점점 완벽해진다고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본래의 모습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며 반대의 모습에 집착할수록 자신의 정체성은 거품처럼 잃어간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조화”인데, 한쪽 면에만 집착하는 것은 파멸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완벽해야만 한다는 집착으로 인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태희의 눈, 이효리의 코, 한가인의 이마, 한예슬의 턱을 모아서 성형한다면 과연 최고의 미인이 될 수 있을까?

“조화”가 없다면 괴물이 탄생될 수도 있다.


이 영화는 쉴 틈 잆이 긴장하게 만든다. 영화의 엔딩은 최고의 절정 경험을 한 ‘니나’의 "나는 완벽해"라는 대사로 끝을 맺고, 그때서야 관객들도 간신히 강렬한 강도와 속도, 긴장으로 혹사당한 감정들을 매트 위로 던져서 쉴 수 있다.

흑조가 되길 간절히 원했던 <니나> "난 완벽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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