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조직 해부학
한 때 침묵하는 조직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처음 입사했을 때 꽤나 열정이 가득했다. 내가 맡은 일을 잘 해내고 싶었고, 실제로 성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열정의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우리 회사는 수평적인 조직 문화입니다. 의견이 있다면 편하게 말해 주세요." 그 말은 나의 열정에 불을 지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 않아 그 열정에는 매서운 찬물이 끼얹어졌다. "까라면 까야죠 뭐", "무슨 힘이 있겠어요." 겉으로는 웃으며 소통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복종과 침묵을 원하는 이중적인 신호들이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 나의 입은 달싹거리다가 다물어졌다. 회의 시간에는 우울했고, 머릿속에는 업무에 대한 고민 대신 '어떻게 하면 튀지 않을까' 하는 눈치 게임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나던 어느 날, 나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소극적인 사람이었어?"
나는 그때 알았다. 원래 소극적인 사람도 아니었지만, 내가 변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적응한 것이라는 사실을. 조직심리학에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심리적 안전감(Psychological Safety)'이 부재한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도 모르게 스스로 껍데기가 되기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조직에서 벗어난 지금, 나는 그때의 상황을 심리학으로 분해하고 분석해보고 싶었다. 도대체 왜, 수많은 기업이 혁신과 소통을 부르짖는데도, 구성원들은 점점 더 입을 꾹 다무는 것일까?
조직심리학의 대가인 에드가 샤인(Edgar Schein)의 '조직문화 3단계 모델'은 이 기이한 현상을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 샤인은 조직문화를 빙산에 비유했다.
: 눈에 보이는 환경(오픈형 오피스, 호칭 파괴, 티타임 등)
: 조직이 겉으로 내세우는 슬로건 ("우리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등)
: 조직과 구성원들의 무의식 깊이 깔린 진짜 믿음 ("상사의 말을 거스르면 죽는다", "중간만 하는 게 최고다" 등)
내가 겪은 문제는, 바로 2단계인 '표방하는 가치'와 3단계인 '기본 가정'의 거대한 괴리(The Gap)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회사는 소통(가치)을 말했지만, 조직의 공기는 철저한 상명하복(기본 가정)이었던 것이다. 이 모순된 메시지는 구성원에게 '이중 구속(Double Bind)'이라는 심리적인 덫을 놓는다. 그러다 보니 결국, 의견을 내자니 기본 가정을 위반해 찍힐 것 같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표방 가치에 반해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일 것 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이러한 인지 부조화 속에서, 구성원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생존 전략은 '자아의 철수(Withdrawal)', 즉 출근할 때 영혼은 집에 두고 껍데기만 데리고 가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괴리가 지속되면 조직과 개인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마틴 셀리그만의 실험 속 개처럼, 구성원들은 몇 번의 거절과 무시를 경험한 후 "어차피 말해도 바뀌는 건 없어"라는 무력감을 학습한다. 이는, 단순한 게으름이나 회피가 아니라, 반복된 좌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생존 전략과도 같다.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심리적 안전감이 없을 때 우리는 업무 문제 해결이 아닌, 대인관계의 위험 관리(Impression Management)에 뇌의 에너지를 모두 탕진한다고 말한다. 즉, "이 말을 하면 바보 같아 보일까?", "저 의견에 반대하면 괜히 예민해 보일까?" 같은 고민을 하느라 정작 혁신 활동에 쓸 뇌의 용량은 남아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참 안타까울 때가 많다. 왜냐고? 정작 똑똑하고 경험이 많은 인재들을 뽑아놓고, 그들을 '눈치나 보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병든 문화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까? 흔히 리더 한 명만 바뀌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심리학적 해법은 그보다는 더 입체적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겉으로 외치는 구호(Espoused Values)와 속내(Basic Assumptions)를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실패해도 괜찮다"라고 말했다면, 실제로 실패했을 때 비난 대신 '학습과 성장의 기회'를 제공하는 반증 데이터(Disconfirming Data)'를 만들어야 한다.
리더가 먼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취약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구성원들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은 "완벽해야 살아남는다"라는 기본 가정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것이다.
퇴사 후, 연구자로서 내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팀원(Follower)'의 역할이다. 우리는 상사를 종종 절대 권력자나 공포의 대상으로만 인식할 때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시선을 조금만 비틀어 볼 수도 있다. 그 상사 또한 거대한 위계질서 속에서 성과를 압박받는, '두려움에 떠는 또 다른 개인'일 수도 있다는 점을 인식해 보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도, 강압적인 태도는 종종 내면의 높은 불안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상사의 권위 뒤에 숨겨진 그 불안을 읽어낼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비난 대신 '저 사람도 위에서 쪼이느라 참 힘들겠구나'라는 연민(Compassion)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아마 상사를 '적'이 아니라 '환경의 피해자'로 바라보는 순간, 역설적으로 우리는 공포나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팀장님도 힘드시죠?"라고 건네는 공감 한 마디가, 때로는 굳어버린 조직의 기본 가정을 녹이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심리적 안전감은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내는 '꽃밭' 같은 걸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문제가 있을 때 문제라고 말할 수 있고, 치열하게 논쟁하고 싸워도 뒤끝이 없으며, 실수하거나 실패를 해도 나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단한 토대'를 의미한다.
나는 비록 그 토대가 없는 곳에서 한 번 걸려 넘어졌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겪은 침묵과 무기력은 개인의 탓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진정한 변화는 리더의 결단뿐만 아니라, 서로를 '나약함을 가진 한 명의 인간'으로 바라보는 구성원들의 따뜻한 시선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여러분의 조직은 어떤 모습인가? 우리가 외치는 혁신이라는 구호 아래에, 혹시 침묵이라는 기본 가정이 흐르고 있지는 않은가?
제인 마크 Jane Mark
MindMark Lab은 행동신경과학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인간의 잠재된 욕망과 행동 원리를 분석하여,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위한 최적의 성공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휴먼 솔루션 연구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