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별을 위한 사랑 3-1.
준호란 남자가 사랑했었던 서영이란 여자는 어떤 여자였을까요? 세 통의 편지 내용이 구구절절 온통 지난날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약간 좀 닭살이 돋기도 했지만, 왜 그러잖아요.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유치 찬란이란 말. 아마 저도 편지를 읽으면서 샘이 나서 잠시 그렇게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여자는 얼마나 행복했었을 까요? 편지가 이 정도이니까 만나면 더 하겠지요? 참 궁금해집니다. 규석이가 보내왔던 편지들도 같이 보았습니다. 왜 서영이의 편지를 보면서 규석이 생각이 자꾸 나는지 모르겠어요. 점점 그가 보고 싶어 지내요. 마지막 한번만이라도 …….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조용히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작은 마음의 상자 안 에요.
제대 이 후 한동안 저를 찾고 있다는 그의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규석이하고 함께 알고 있는 친구들과도 모두 연락을 끊었어요. 엄마는 그렇게 까지 해야 되냐고 물었지만 그래야 규석이를 잊을 수 있을 거 같았어요. 그리고 그래야 규석이도 절 잊을 수 있을 거 같았구요. 규석이도 많이 슬퍼했나 봅니다. 그도 많이 놀라고 어리둥절했었겠죠. 한순간에 사랑했던 사람이 증발해 버린 거나 다름없었으니까요. 그의 사랑을 내가 못 믿은 건가요? 아니 그 보다는 그 사랑을 알기에 더 이상 상처주기가 싫은 거 같아요. 이제는 그도 주변을 통해 내가 얼마 못 산다는 것을 알고 있겠죠? 그도 서영이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났으면 해요.
2년 전
“아직도 여친 소식은 알 수 없는 거야?”
“아무도 모른다고 하니.”
규석이의 깊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일부러 안 알려 주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모르겠어.”
규석이는 범수가 따라준 술을 벌컥 마시며 말했다. 범수도 술 한 잔을 입에 넣었다.
“근데, 주변에 걔 소식 알 만한 사람도 없어? 그래도 친한 친구들하고 소식은 전하고 살 거 아냐?”
“일부러 연락을 다 끊은 거 같아.”
규석은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은 듯 체념조로 말했다.
“소식 끊긴지 얼마나 된 거지?”
“벌써 6개월 다되어 가.”
규석이는 여전히 가슴이 아려 왔다. 재대 이후 정현이를 찾기 위해 백방 노력을 했지만 아무런 소득은 없었다.
“이번에 복학은 해야지. 정현이 찾는다고 지난번에 못했잖아?”
“해야지.”
규석이의 한 숨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범수는 또 한잔을 벌컥 들이마셨다.
“집이나 학교는 가 봤어?”
“진작에 가봤지. 집은 이미 이사를 갔더라구. 이사를 온 사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고. 핸드폰은 말 할 것도 없고, 메신저며 모든 활동이 중단되거나 차단되어 있어. 심지어 학교에는 나 제대하기 전에 이미 휴학신청을 해 놨더라구. 과 친구들이나 주변에 알 만한 사람들에게 물어봤는데, 정현이의 소식을 얘기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입막음을 잘 해 놨나 보네.”
범수는 지원이가 생각이 났다. 규석이는 대학교에 와서 만난 친구지만 둘 다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여자 친구 얘기로 서로 가까워지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규석이는 정현이하고 연인관계로 발전할 즈음 범수는 지원이하고 여전히 친구 이상을 이어가지 못했었다. 그런 범수를 규석이는 놀리기도 하고 좀 더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라고 했지만 재수를 하는 지원이에게 범수는 먼저 얘기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범수는 군대를 갔고 지원이는 재수도 실패를 한 후 직장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범수가 제대할 쯤 지원이는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범수에게 정식으로 얘기를 했었다. 문득 규석의 친구인 정현이도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이 생긴 건 아닐까? 그래서 널 떠날 수 도 있잖아?”
“야! 그런 건 아니거든! 너 하고는 차원이 달라. 우리는 결혼까지 얘기가 된 사이라구!”
규석이가 정색을 하고 범수에게 말했다.
“근데, 그것도 아니면 그럼 왜 하루아침에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걸까?”
“그러게 말이다. 실종신고도 해 봤는데 이런 사례는 대상이 아니래.”
“너도 참 대단하다. 정말 할 만큼 다 해봤네.”
범수는 규석이의 등을 두드려 줬다.
“무슨 병 걸렸다고 했지?”
범수는 예전에 얼핏 들었던 얘기를 떠올리면서 물었다.
“암이라고만 들었어. 자세한 건 모르겠고. 살았는지 죽었는지 라도 알았으면 좋겠다.”
규석의 긴 한 숨이 분위기를 더 가라앉혔다. 규석이는 정현이와의 마지막 만남을 생각했다.
“잘 지냈어? 모자는 왜 쓴 거야?”
“너 만나려고 멋 한번 부렸다. 안 이뻐? 이상해?”
정현이가 발그레한 얼굴로 말했다.
“아니, 이뻐.”
규석이는 정현의 얼굴을 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제 얼마 남았지?”
“2달 남았지. 이번이 마지막 휴가야.”
규석은 이미 제대한 사람처럼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2달 후면 이제 사회인 되는 거네.”
“응. 갈 때는 언제 제대날짜 오나 싶었는데 막상 지나고 나니 금방 지나간 거 같아. 넌 이제 한 학기 남았잖아.”
“응 근데 휴학 할까 해.”
정현이가 포도주스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왜?”
정현이의 말에 규석이는 당황했다.
“그냥, 뭐 자격증도 좀 따고. 어학연수도 갔다 올까 싶기도 하고.”
“그럼 나 재대하고 나서 같이 어학연수 갈까?”
정현이의 무미건조한 답변과 달리 규석이는 이미 어학연수라도 간 것처럼 신이 나서 정현이에게 물었다.
“봐서.”
“뭐야? 나하고 가기 싫은 표정으로.”
규석이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그게 아니라 아직 뭐 결정한 게 없어서. 막상 졸업하려고 하니 준비해 놓은 것도 없고. 아직 생각 중이야. 넌 나오면 바로 복학할거니?”
정현이가 화제를 돌리며 규석이에게 물었다.
“나도 생각 중이야. 바로 복학할지 아니면 다음 학기에 하고 이번 학기 휴학하면서 자격증이나 딸까 싶기도 하고. 너 어학연수 가면 나도 따라가고.”
규석이는 이미 반쯤은 어학연수를 가기로 결정한 사람처럼 보였다.
“야. 뭐 어학연수를 그렇게 번개 불에 콩 볶아 먹듯이 가냐? 준비해야 할 것들도 얼마나 많다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너 가면 나도 가겠다는 거지.”
규석이는 그때 정현이의 행동을 보고 눈치 채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모자를 쓰고 온 것부터 평소에는 같이 술도 잘 마시던 애가 그날따라 술 대신 커피숍에서 과일주스를 시킨 것이 다 이상스러운 행동이었다. 어쩌면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규석이는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너 나오면 친구들과 맨날 술판 벌일 건데 오늘만이라도 니 간 에게 휴식을 줘.”
“네가 언제부터 내 건강 챙겼다고 그러냐?”
술을 먹자던 규석의 말에 정현이는 단칼에 거절을 했었다.
“재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조심해야지. 말년 병장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한다며?”
“하하, 그건 옛말이지. 요샌 그런 거 없어. 그러지 말고 한잔 하자.”
“그래도 오늘은 쉬어. 나도 집에 가서 밀린 리포트도 써야 하고.”
정현이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규석이와이 자리를 멀리 했었다. 그때는 규석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막상 지금 생각해보면 이별을 위한 정현이의 의도된 행동이었다.
정현이는 규석이가 제대하기 한 달 전 편지를 마지막으로 연락을 끊었다.
‘제대 얼마 남지 않아서 이 편지가 이제 마지막이겠다. 건강히 잘 지내다 와.’
규석이는 정현이와 연락이 안 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과 몇 달 전만해도 다정하게 만났던 친구가 갑자기 모든 연락이 두절되었다. 규석이는 처음에는 정현이의 서프라이즈 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차츰 걱정으로 바뀌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이건 꿈이야.’
자신이 지금껏 만나고 사랑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렸다. 아니 그 가족들 모두가 사라지고 없었다.
‘제발 어디 있는지 라도 알려주면 안 될까? 아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라도 알려주면 좋겠다. 이거 읽으면 바로 답장 줘.’
규석은 알딸딸한 상태에서 정현이에게 메일을 보냈다.
열지 않은 메일이 더 늘어났네요. 처음에는 스팸 메일은 삭제를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내버려 두기 시작하니 잡초처럼 무성하게 늘어나서 이제는 일반 메일보다 스팸 메일이 더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요. 메일을 열어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다시 나와 버립니다. 그러기를 오늘도 벌써 몇 번이나 하고 있네요.
이제는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칼바람처럼 느껴져요. 확실히 겨울은 겨울인가 봅니다. 엄마는 바람이 차다고, 감기 걸린다고 걱정하며 창문을 닫지만, 전 그 바람이 좋아요. 그래서 엄마 몰래 조금 열어 놓고 바람을 느낍니다.
올 해도 다 가고 있네요. 이제 곧 새해가 오겠죠? 새해가 오면, 그때까지 잘 버틸 수 있을까요? 의사선생님은 치료만 잘 하면 오래 살 수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전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고 싶은데 ……. 거짓말 같아 이제는 믿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가 살아 있는 동안만 살고 싶어요. 점점 면역력도 떨어집니다.
“백혈병 보다 감기나 기타 다른 병으로 인한 합병증이 더 무서울 수 있어요.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라 일반인보다 쉽게 걸리고 빨리 낫지 않아요. 특히 감기에 안 걸리도록 조심하세요.”
지난 번 고열로 쓰러져서 병원 응급실에 갔을 때 의사선생님은 엄마에게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사실 엄마는 잘 못이 없는데 의사선생님은 저에게 말하는 대신 엄마에게 얘기를 하며 주의를 주었죠. 엄마는 죄지은 사람 마냥 연신 주의하겠다고 했구요.
퇴원을 한 날 집에 와서 전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 되었어요. 그럴 때는 엄마가 미워요. 유리 상자에 갇힌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산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방안에 혼자 있으면서 오래 사는 게 행복한 건가요? 아님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행복한 걸까요? 요즘은 헷갈려요. 무엇이 사는 건지, 무엇이 행복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저 엄마가 울지 않고, 엄마가 제 걱정안하고 엄마도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문득 엄마의 행복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나하고 오래 같이 사는 게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없으면 엄마는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와 잘 지내다가도 저의 소소한 행동 때문에 많이 부딪힙니다. 엄마는 내가 정말 뭘 원하는지 알고 그러는 걸까요? 엄마도 나와 행복하게 살고 싶을 텐데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안 돼’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내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말이죠.
엄마는 방안에 혼자 이렇게 하루 종일 있는 내 모습이 행복해 보일까요? 난 엄마의 전리품이 아닌데 말입니다. 엄마는 나의 행복이 뭔지를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게 엄마를 위한 건지 나를 위한건지도 모르겠어요. 엄마도 그런 생각을 할까요?
갑자기 엄마의 행복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동안 엄마는 어떨 때 행복한지 물어보지 않았던 거 같아요. 그냥 둘이서 각자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던 거 같아요. 아빠가 일찍 돌아가신 후 엄마는 더욱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엄마는 직장, 집 이렇게만 다닌 거 같아요. 엄마에게도 친구가 있을 텐데 말이죠. 제가 기억하기로 정말 엄마가 친구를 만나는 것을 본적이 없는 거 같네요. 가족이라고는 외동딸로 자란 엄마에게 유일한 혈육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뿐 입니다. 아빠 가족들하고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한동안은 왕래도 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뿐만이 아니라 엄마도 연락을 끊었어요.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그냥 시나브로 그렇게 된 거 같아요. 엄마의 삶도 참 기구하단 생각이 드네요. 엄마는 내가 있어서 행복한 걸까요? 내가 있어 불행한 걸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