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거리

4. 내가 아는 사랑, 내가 모르는 사랑 4-2.

by 미운오리새끼 민

“날 잡혔다며?”

규석이가 범수에게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저녁 시간대라 학교 앞 커피숍은 한산했다.

“응, 한 이주 남았어.”

범수가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후 말했다.

“너하고 저녁에 술 안 마시고 커피 마시는 게 어색해. 괜찮겠냐?”

규석이는 주변을 둘러보다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아니, 기증하는 거. 난 아직 헌혈도 안 하는데 너 보면 이제라도 헌혈이라도 해야 하나 싶다.”

규석이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하기로 맘먹었으니 해야지. 상대방은 얼마나 기다리겠냐? 그리고 만약에 그 대상이 아이라고 하면 부모 맘은 어떻겠고.”

범수는 덤덤하게 규석이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따지면 그렇지.”

“그리고 기증한다고 다 성공하는 건 아니래.”

“그래?”

규석이가 의외란 표정으로 물었다.

“응, 환자의 몸에서 잘 적응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시 할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그럼 또 해야 하는 거야?”

규석이가 놀라면서 범수에게 물었다.

“하하,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고?”

범수가 규석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사람이 할 수도 있다니?”

규석이는 범수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서 놀란 토끼 눈을 한 상태로 물었다.

“다행히 나 말고도 일치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고 하더라고.”

“그게 쉽지 않다며?”

규석이는 범수의 말에 계속 놀랐다. 수수께끼처럼 범수의 말은 계속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응, 그런데 이 사람은 운이 좋은 거지. 그래서 첨부터 못 하게 되면 빨리 말해달라고 하더라구.”

“그런데 왜 너에게 먼저 말했대?”

“내가 좀 더 젊은가 봐. 그래서 나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하더라구.”

“맘 같아선 너 기증할 때 가고 싶은데 될지 모르겠다.”

규석이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 너도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잖아. 직장생활은 할만 해? 너 취직 턱 얻어먹어야 하는데.”

범수가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

“뭐 아직 잘 모르겠어. 열심히 일 배우는 중이지. 너 기증하고 나면 나 첫 월급 때 되겠다. 그때 몸보신 겸 너 에게 한턱 쏠게.”

규석이가 웃으며 말했다.

“야, 너 정말이지? 약속 지켜라.”

범수도 웃으며 말했다.

“가영이 하고는 잘돼가?”

범수가 뜬금없이 가영이 얘기를 꺼냈다.

“하하, 그때 너랑 같이 만난 이후에 한 번 얼굴 보고 가끔씩 연락만 해. 걔도 취직 준비하느라고 바쁜 거 같아.”

규석이가 멋 적은지 웃어넘기며 다른 핑계를 댔다.

“시험 준비 하는데 지장은 없어?”

“응, 뭐 기증하고 나서 한 달 있다가 시험 보는 거니 영향은 없을 거 같아. 그전에 더 열심히 해 놔야지. 그건 그렇고 정현이는 이제 잊은 거야? 핸드폰 번호 안 바꾼 거 보면 아직 못 잊은 거 같기도 하고. 이제 취직도 했는데 핸드폰 바꿔야 하는 거 아냐? 번호 연결 서비스 신청하면 되잖아?”

규석이가 낡은 2G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잊혀 지겠냐? 넌 지원이 잊혀지니?” “야, 걔는 그냥 친구고. 너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니까!”

범수가 정색을 하며 말했다.

“가끔씩 생각 나. 보고 싶은 생각도 들고. 어디서 뭘 하는지. 정상적으로 졸업을 했으면 아마도 사회 선배일 텐데. 회사 여자 또래 동기들 보면 더 생각나더라구. 같이 직장 다녔으면 지금쯤 결혼 얘기도 나오고 하지 않았을까 싶어.”

규석이는 땅이 꺼져라 한 숨을 푹푹 쉬면서 말을 했다.

“지금도 메일 보내?”

범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취업했다고 보내고 나서는 안 보내고 있어. 한 번도 내 메일을 열어 본 적이 없어. 일부러 안보는 건지, 아니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못 보는 건지, 소식이라도 알면 좋겠는데 …….”

규석이는 한동안 말없이 창밖만 바라봤다.

가영이는 매대에 물품을 정리하다 말고 벨소리에 반사적으로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서둘러 계산대로 갔다. 휴가 나온 군인 두 명이 편의점에 들어오자마자 계산대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

“뭐로 드릴까요?”

가영이는 계산대 앞으로 들어가면서 군인 중 한 명을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아직 앳된 얼굴의 군인이었다.

“플러스주세요.”

그 중 하나가 가영이에게 말했다. 가영이는 능숙하게 담배를 꺼내서 계산을 마치고 그들이 나가자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둘은 횟집이 있는 거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찬우 제대 소식 들었니?”

소라가 기말고사가 끝날 무렵 가영이에게 물었었다.

“몰라, 그걸 왜 나에게 물어?”

가영이가 정색을 하며 말하자 소라는 겁먹은 사람처럼 가영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니, 제대 했다고 얼마 전에 과에 들렸나봐. 남자 동기들 만나서 술 한 잔 하는 거 같더라구.”

소라의 말에 가영이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과 CC로 소문이 자자했던 둘은 찬우가 군대를 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이목에서 사라졌었다. 둘이 헤어진 것을 아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겉으로는 가영이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 가영이도 그런 것이 부담스러워서 일부터 과에는 잘 가지 않고, 과 친구들이 듣는 수업과는 별개의 수업들을 가급적 신청했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과 사람들과도 친하게 되었고, 범수도 그 중 하나였다. 범수의 다정함과 세심한 배려가 때로는 가영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기도 했지만, 그 이상 더 진전되는 것은 없었다. 자신이 다가가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도 그 이상 선을 넘어오지 않고 항성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가 그 선을 넘어서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바란 적도 있었던 거 같기도 했다. 가영이는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빤, 지나간 사랑을 잊을 수 있어요?”

가영이가 버스를 기다리며 규석이에게 물었다.

“어려운 질문인데.”

규석이가 술에 취한 듯 알딸딸한 표정으로 바로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을 기억할 거여요?”

가영이는 규석이를 바라보며 웃으며 물었다.

“글쎄, 그건 상황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뭐가 상황에 따라 달라요? 그건 말이 안 되죠!”

가영이는 규석의 황당한 말에 갑자기 핏대를 높이며 말했다.

“뭐, 서로 나쁜 감정으로 헤어졌다면 생각 안할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기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넌 안 그래?”

규석이는 가영이의 말에 멈칫 하면서 정현이가 생각났다.

“그럼 오빠는 사랑하는 사람이 옛 사람을 잊지 못하고 산다면 이해할 수 있어요?”

“…….”

“오빠도 못 잊는 구나.”

가영이는 체념한 듯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난, 나만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가영이는 버스가 오는 쪽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오빠 저 버스 왔어요. 갈게요. 고마웠어요.”

“가영아!”

규석이는 뭐라 말도 못하고 가영이가 버스 타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버스에 앉은 가영이가 손을 흔들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그 이후로 규석이가 만나자고 몇 번 연락이 왔었지만 가영이는 취업을 핑계로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가영이는 창밖너머로 바다를 봤다. 한 여자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해변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난 너에게 맞추려고 노력하는데, 넌 나에게 맞춰 준적 있어? 넌 항상 너의 관점에서 나를 봐. 나의 관점에서 나를 볼 수는 없는 거니? 내 상황을 한번이라도 이해하고 넘어 가 준 적 있어?”

수화기 너머로 찬우의 말이 속사포처럼 들렸다.

“난 그래도 아까 니가 나를 나두고 간 게 이해할 수가 없어. 너무 많이 화가 나고 아직도 서운해. 어떻게 나 혼자 두고 갈 수 있어?”

가영이도 여전히 분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화나서 너 가는 거 안 보고 갔다고 지금도 뭐라 하고. 그럼 화났는데 너 가는 거 다 확인하고 가는 게 정상이니? 감정 이미 상할 대로 상했는데 거기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라고? 넌 그게 되니? 넌 기분 나쁠 때 그냥 휙 가버리면서, 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은 무슨 심보니?”

찬우는 감정이 폭발할 것을 겨우 참으며 최대한 소리를 낮춰가며 말했다.

“다른 남자 같으면 택시 잡아주고, 택시 넘버도 보고 내가 타고 가는 거 확인했을 거야. 너무너무 화가 났었어. 술 취한 여자를 혼자 가게 내버려 두고. 넌 내 걱정보다는 자기감정이 우선인 거야.”

“지금 누구랑 비교 하는 거야? 그 사람은 기분이 상해도 다 해줬나보지? 너 화나면 니 맘대로 하는데 나보고 어쩌라고? 먼저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찬우의 목소리가 약간 격양되었다.

“지금 대화도 너는 계속 내 탓으로만 얘기하는 것도 싫어. 니가 나에게 생각하는 것이 거기까지인가 싶어.”

가영이는 지지 않고 끝까지 말했다.

“그래 모든 게 다 내 탓이고 내 잘못이야.”

찬우는 더 이상 가영이하고 말하는 게 싫었다.

“아까도 딱 이랬어. 그래 다 내 탓이야. 그런가 보지 뭐, 그래 그런 걸로 쳐 이런 분위기. 그래서 더 화나.”

“넌 내가 뭘 얘기해도 안 믿는데 어떻게 하니? 좀 그러면 너도 그래 알았어 하고 넘어가 주면 안 되는 거야? 내가 그런 거 같고 거짓말 하는 사람도 아니고 니 혼자 상상의 나래 펴고 혼자서 다 판단하는데 내가 아니라고 하면 믿어주면 안 돼?”

찬우도 더 이상 밀리기 싫었다.

“그만 얘기해.”

“화도 내지 말라고 해서 웬만하면 화도 안내고, 큰 소리 내지 말라고 해서 그것도 자제하고 있는데 어쩌다 그런 거 같고 넌 화내고 삐지고, 난 사람도 아니니? 그리고 그렇게 화나게 만든 사람이 누군데? 너도 어느 정도 하면 그냥 알았어 하면 되는데 한 번도 그냥 멈추지 않잖아? 니가 적당히 하면 왜 화를 내냐? 너는 내 앞에서 할 거 다하고, 난 니 앞에서 아무것도 하면 안 되고 이게 말이 돼? 사랑하는 사이 맞는 거니? 니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줘야 널 사랑하는 거니? 니 중심으로 다 생각하고 해석하고 꼬투리 잡고, 백번 잘해도 한번 실수하면 그것 갖고 뭐라 하고 그 전에 잘한 건 아무 소용도 없고. 너에게 난 뭐니? 너를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이야? 난 개인적인 삶도 없는 거니?”

찬우는 하고 싶은 말을 속사포처럼 끊임없이 내 뱉었다.

“알았어. 그만 얘기해. 계속 감정만 더 상해.”

가영이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날 이후 가영이는 며칠을 앓아 누었었다. 하지만 찬우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사귀는 시간은 2년이 다 되 갔지만 헤어지는 시간은 두 시간도 안 되게 끝났었다.

‘지나고 나면 별거 아닌 일로 싸우고 헤어지는 거야.’

가영이는 그냥 웃음이 나왔다. 정말 싸움의 발단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감정의 골들이 한순간에 폭발하면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버린 거 같았다. 그리고 서로 그것을 주워 담기에는 너무 넘지 말아야 할 감정의 선을 많이 넘었었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과정이었을까?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었나? 아니면 철부지 사랑이었을까?’

죽고 못살 정도로 붙여 다녔던 찬우였지만, 그렇게 헤어지고 난 후 매정할 만큼 둘은 만나지 않았다.

‘그래도 한번쯤은 화해의 제스처는 했어야 하는 거 아냐?’

가영이는 찬우가 자신에게 한 번도 다가오지 않은 것이 화가 났다. 군대라는 시간과 거리의 장벽이 있었지만, 그래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었다.

‘이제와 이 시점에서 왜 찬우가 생각날까?’

가영이는 찬우를 마주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시 한 무리의 군인들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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