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거리

4. 내가 아는 사랑, 내가 모르는 사랑 4-1.

by 미운오리새끼 민

“삼천 오백 원이요. 봉투 필요하세요?”

“아니요.”

가영이는 제품에 바코드를 다 찍고 나서 손님에게 카드를 받았다. 카드 단말기에 넣고 결재가 완료되자 다시 손님에게 카드를 전해줬다. 손님이 나가고 가영이는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바닷가에는 띄엄띄엄 사람들이 있었다. 겨울 바다라 바람도 차고 파도도 높게 일었지만, 사람들은 옷을 꽁꽁 싸맨 상태에서 그런 파도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거나 총총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메신저 알림 음이 울렸다. 손님이 다시 물건을 갖고 오는 바람에 가영이는 핸드폰을 옆으로 밀쳐두고 다시 바코드 스캐너를 들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받았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내려와서 가영이는 바닷가 근처 동네 편의점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잡았다. 질리게 보는 바다지만 가영이는 매번 바다를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이 들었다. 겨울 바다는 연인끼리 오는 경우가 많이 있지만, 혼자 찾아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다. 계산대 앞에서 혼자 해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어떤 사연을 갖고 왔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가영이는 아까 읽지 못한 메신저를 확인했다. 불합격 통보였다. 바다를 한번 바라봤다. 그리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메신저를 삭제하고 계산대 앞에서 매장을 둘러보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언니, 저 왔어요,”

“응, 일찍 왔네. 천천히 옷 갈아입고 와.”


따뜻한 커피를 갖고 가영이는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바람이 걷히니 파도도 잔잔했다. 한 남녀가 다정히 해변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추위를 이겨보려고 어깨를 맞댄 채 꼭 껴안고 있었다. 슬픈 미소가 가영의 입가에 흘렀다. 연애를 언제 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찬우와 헤어진 후 가영이는 연애를 할 수 없었다.

“넌 항상 니 멋대로야. 너 밖에 몰라.”

찬우의 말이 아직도 생생히 들리는 듯 했다.

“왜 나는 항상 니가 원하는 대로만 해야 해? 니가 공주야? 모든 사람이 너를 위해 다 맞춰줘야 하는 거야? 너는 내 앞에서 있는 승질 없는 승질 다 부리면서 정작 나는 화가 나도 참아야 하고, 지가 아쉬울 때는 언제나 나 찾아서 부탁하고, 니가 부르면 언제나 와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삐지고 화내고, 내 말은 믿지도 않고 자기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스스로 스트레스 받고, 그걸 내 핑계로 돌리고, 언제까지 내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니?”

찬우가 쌓였던 감정을 폭발하듯 거침없이 말했다.

“누가 그렇게 해달라고 했어? 난 한 번도, 단 한 번도 어떻게 해달란 적 없었어. 정작 내가 필요할 때 있어 주지도 않으면서, 그럴 땐 매정하게 굴면서 나 위하는 척, 신경 써 주는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너무 싫어. 하나도 달갑지 않아.”

가영이가 눈을 흘기며 찬우를 등지고 말했다.

“넌 내 생각은 일도 안 하잖아? 내 상황은 어떤지 불가피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지금 필요한데 그러지 못하는 것만 문제 삼잖아. 내가 못 오고 싶어서 못 오는 것도 아닌데 넌 그런 나에 대해서 배려하지 않잖아. 내가 니 옆에 착 달라붙어 있을 수는 없잖아?”

찬우가 답답하다는 듯 가영이 앞에 가서 그녀를 보며 말했다.

“그때 니가 정말 필요했으니까 그렇지!”

가영이가 울먹이며 말했다,

“네가 원할 때 어떻게 항상 네 곁에 있어 주니? 나도 불가피하게 일이 있을 때도 있고 어쩔 수 없이 못갈 때도 있는 건데. 네게 100% 맞추라는 건 너무한 거 아냐?”

찬우가 타이르듯 가영이의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그러니 됐어! 미안해. 다 똑같아. 난 내가 필요할 때 있어 줄 사람이 필요한 거지 니가 시간 될 때 와 주는 사람은 필요 없어.”

가영이가 찬우의 손을 뿌리치며 말했다.

“지친다 지쳐. 나는 너와 대화를 하고 싶고, 너와 좋은 방향으로 얘기를 하고 싶은데, 너하고 얘기하다 보면 항상 극단으로 가는 거 같아.”

찬우는 허공을 보며 말했다.

“지겨워 그 말도. 그만해!”

“왜 너는 항상 이기려고 만 해? 나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잖아. 너도 인정할 건 인정하면 안 돼는 거야?”

찬우가 하소연 하듯 가영이를 보며 말했다.

“난 그러면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겨. 더 삐딱하게 나가고 싶다고. 좀 그럴 때는 가만히 있어주면 안 돼? 내가 얘기했잖아. 그러면 나도 좀 생각해 보고 내가 미안하면 그때 얘기한다고!”

가영이는 찬우를 달려들 기세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래, 그래서 지금까지 많이 기다려 주고 내가 양보했었어. 그런데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왜 나만 항상 변해야 하고, 나만 양보해야 하는 거야? 너 중심으로 세상은 돌아가지 않아!”

“알았어. 그러니 그만해!”


찬우는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군대를 갔다. 그리고 군대를 계기로 가영이와 정리를 하려고 했는지 다시는 연락이 없었다. 가영이 또한 찬우를 찾지 않았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자신을 싫다고 떠난 남자를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거 하나 들어주지 않는 남자라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 이상하게 누군가를 만나거나 다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영이에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종종 있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히려 가영이 스스로 적당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야. 누구에게 의지하며 산다는 것은 의미가 없어.’

문득 범수 오빠가 지난 번 결혼식 때 가면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혼은 진정한 친구를 얻기 위해서 하는 거야.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니가 필요할 때 만나고 싶다고 항상 만날 수 없지만, 부부란 존재는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만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의 고민을 들어주고 나를 믿어 주며, 내 편을 들어주는 유일한 사람이지.”

‘찬우에게 난 무엇을 바랐던 걸까? 친구랑은 다른 의미의 사람일까? 결혼을 하면 정말 다 그렇게 할까? 나를 위해서 내편을 들어주고, 나만을 위해서 살 수 있을까? 부부사이에도 거리는 있지 않을까?’

남자가 자신의 목도리를 풀어 여자의 목과 머리에 감싸줬다. 뭣이 좋은지 여자는 남자의 품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어느덧 손 안의 커피가 차갑게 느껴졌다. 가영은 해변으로 가서 파도 앞에 멈춰 섰다. 파도가 금방이라도 자신을 덮칠 것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 들었다.

오늘도 전 운동 아닌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사실 몸이 힘들어서 운동이라고 해 봤자 방안을 왔다 갔다 하는 게 전부지만요. 그래도 이식을 위해서는 몸이 어느 정도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고 하는데 아픈 몸이 뭐 별반 다를 게 있을까 싶기도 해요. 그래도 그동안은 절망의 나날이었는데 지금은 희망이라는 긍정의 힘이 저에게 용기를 주고 있어요. 우습죠?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하루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사는 시한부 인생이었는데 지금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거란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으니까요?

새해를 맞아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무엇을 할까 생각해 봤어요. 만약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제일 먼저 뭘 할까요? 음 ……. 상상만으로도 너무너무 신나요. 생각 좀 해 봐야 할 거 같아요.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니 뭘 먼저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아! 정했어요. 산책을 하고 싶어요. 시원한 바람도 느끼고 싶구요. 그리고 나서 그동안 먹지 못했던 음식을 맘껏 먹어보고 싶어요. 영화관에 가서 영화도 보고 싶구요. 쇼핑도 하고 싶어요. 아, 제 방에 거울도 다시 달아야 겠어요. 화장품도 사야 하구요. 음, 그리고 또 복학도 해야 겠죠? 애들이 저보고 아줌마라고 놀리지는 않겠죠? 복학생들보다 더 나이 많은 누나인데 ……. 규석이는요? 음 ……. 모르겠어요. 만약에 다른 여자가 생겼으면 못 만날 거 같아요. 아직까지 솔로이길 바래야죠. 절 못 잊고 있는 순정파로. 정말 여자가 있다면 배신감 들 거 같아요. 참, 이기적이죠? 언제는 저를 빨리 잊고 다른 사람 만나길 바란 적도 있었는데. 사실 그때도 솔직히 쬐금은 절 잊지 않고, 평생 기다리며 살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어요. 최소한 저 죽을 때 까지는 말이죠. 저도 잊지 않고 있는데 지가 먼저 절 잊는 다는 게 너무 억울할 거 같았거든요. 아무튼 규석이는 잘 모르겠어요. 두려워요. 그래도 보고 싶네요. 제일 먼저 만나고 싶지만 저의 생각이 깨질 거 같아 두려워서 먼저 못 만나겠어요.

아무튼 하고 싶은 게 이렇게 많은 줄 정말 몰랐어요. 남들에게는 소소한 일조차 그동안 저에게는 꿈만 같은 일이었으니까요. 올해는 기필코 이 일들을 다 할 수 있겠죠?

엄마가 올 시간이 다가오네요. 엄마가 기다려져요. 요즘 들어 엄마와 저는 하루하루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거 같아요. 아직 뭐가 이루어 진 것도 아닌데 희망 하나가 이렇게 삶을 바꿔 주는 거 같아요. 마중을 나가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겠죠? 군대의 말년 병장의 마음이 이런 걸까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한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빗방울까지 무서워했던 브레히트의 시가 생각나네요. 저도 요즘 매사에 조심조심 하고 살아요. 현관문이 열리고 엄마가 왔어요.

“왔어?”

“응. 뭐 해?”

“응. 운동하고 있었어. 아직 병원에서는 연락 없는 거야?”

“엄마 옷 좀 갈아입고 나올게.”

엄마가 이상합니다. 오늘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전 그냥 조용히 제 방으로 들어갑니다. 괜히 물어 봤다가 불똥이 튈 수도 있어요. 조용히 침대에 누워 다시 즐거운 상상을 합니다. 행복이란 참 우스운 거 같아요. 상상만으로도 병이 다 나은 거 같아요.

“엄마! 거짓말이지? 그렇지? 말해봐. 거짓말이라고?”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정현이는 혈액암 판정을 받은 이후 또 한 차례 큰 충격을 받았다. 실낱같았던 희망이 한순간에 모두 무너져 버렸다.

“정말 기증자가 포기를 했대? 왜? 그럼 처음부터 한다고 하지 말았어야지?”

정현이는 엄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

엄마는 여전히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고개만 끄덕였다. 정현이는 엄마를 등진 채 침대에 누웠다.

“혼자 있고 싶어요.”


차라리 처음부터 기증 얘기가 없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요. 기증은 없었던 것으로 되었습니다. 병원에서도 자세한 얘기는 모르고 기증자가 거부를 했다고 합니다. 보통 본인이 심리적 부담감으로 그만 두는 사례도 있고, 가족의 반대로 인해서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어떤 이유인지 모르지만 지금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기증관련 협회에서도 기증자를 설득하려고 몇 번이나 노력을 했나 봐요. 그런데 결국에는 무산된 거 같아요. 새로운 기증자를 찾아본다고 하지만 그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누군가 기증 등록을 해야 하고 또 그 사람이 저와 일치해야 하는데 그게 쉬웠으면 벌써 했겠죠. 그냥 의사선생님이 저를 위로 하려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모든 희망과 상상은 다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행복했던 엄마와 저는 그날 이후로 말이 확 줄었어요. 저도 더 이상 제 방 밖으로 나가지 않아요. 엄마도 제 마음을 아는 지 뭐라 하지 않네요. 엄마의 얼굴을 보는 것도 싫어졌어요. 다시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졌고, 하루빨리 그냥 죽었으면 하는 생각뿐이네요. 왜 자꾸 눈물이 날까요? 그 사람이 야속해 지기만 합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안한다고 했으면 이런 헛된 기대는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죠. 엄마는 기증자를 직접 만나보겠다고 의사선생님에게 사정을 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대요. 그 사람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죠?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래야 조금은 마음이 위로가 되요. 누구에게는 간단한 선택일수도 있지만, 그 결정이 한 사람의 생명을 좌우한다고 하면 너무 가벼울 테니까요.

이제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의사선생님은 희망을 잃지 말라고 하지만 더 이상의 희망이 있을까요? 항암치료를 지속적으로 받는 것도 의미가 있나 싶어요. 회복이 아니라 그냥 하루하루 연장일 뿐인데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엄마를 위해서 참아가며 버텨 왔지만, 이제는 그럴 마음이 점점 없어져요. 죽지 않으면 이 방에서, 아니 이 집에서는 한 발짝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 삶이 어떤지 아무도 모를 거여요. 살아도 살아 있는 거 같지 않은 삶을 저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요? 생명을 유지한다고 해서 다 똑 같이 사는 것은 아니랍니다. 하루를 살아도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살다 가고 싶어요. 시원한 공기도 마시고, 따뜻한 햇볕도 느끼고, 쇼핑도 하고, 영화도 보고, 바다도 보고 싶네요. 바다는 정말 못 본지 2년은 넘은 거 같아요. 이 집에 온 이후로는 병원을 빼고는 그 어디도 가 본적이 없네요.

이전 09화아름다운 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