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별을 위한 사랑 3-3.
연말이 다가오지만 분위기는 차분한 거 같아요. 언제부턴가 연말이 연말 같이 느껴지지 않은 거 같아요. 물론 저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거리의 캐럴 송도 이제는 들리지 않아요. 갑자기 루돌프 사슴이 사라진 거 같아요. 산타할아버지가 루돌프 사슴을 어떻게 하지는 않았겠죠?
지금은 연말이 다가오면 제일 싫어요. 남들은 다 나가서 송년모임을 하는데 저는 언제나 집에서만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어느 해부터 한해를 마무리 한다는 게 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어요.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한해를 마무리 한다는 것은 그 저 하루가 또 지나가는 쳇바퀴와 같은 날인걸요. 오히려 올해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이 더 있는 거 같아요. 그리고 내년에도 또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이 연말을 어둡게 했어요. 크리스마스가 곧 다가오네요. 왜 사람들은 자기 생일도 아닌데 그렇게 좋아할까요? 기분 탓일까요?
허긴 저도 아프지 않았을 때는 규석이와 밤을 새곤 했었으니까요. 그날은 왠지 집에 가면 안 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리고 화이트크리스마스를 기대했었죠.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어요. 창밖에는 이른 눈이 내리네요. 사람들은 아쉬워 할 거 같아요. 이틀만 늦게 내려도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요. 앙상한 가지 위로 눈이 소복이 쌓였습니다. 시루떡을 뒤집어 놓은 거 같이 나무에 하얀 백설기가 쌓이듯 함박눈이 내리고 있어요.
규석이는 오늘 같은 날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이제는 저를 잊고 좋은 사람들과 송년회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취직은 했을까요? 문득 올해가 졸업반이란 생각이 드네요. 난 아직 졸업도 못했는데 ……. 한 학기를 남겨두고 졸업을 못한 게 아쉬워요. 물론 졸업을 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죠. 이제 와서 졸업장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를 안다녔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랬으면 그 돈으로 원 없이 엄마와 여행도 가고,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을 거 같아요. 그리고 엄마가 조금은 덜 고생했어도 됐겠죠?
올해도 엄마와 조촐히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할 거 같아요.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엄마가 이제는 혼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그러고 보면 전 참 이기적이고 못된 딸이죠? 엄마가 혼자인 걸 뻔히 알면서도 엄마만 나두고 그동안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겼으니까요. 그때는 왜 엄마 생각을 못했을까요? 아니 저 노느라고 안 한 거 같아요. 그냥 엄마도 친구들 만나서 크리스마스 잘 보내고 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요,
‘엄마, 오늘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다 갈 거야. 기다리지 말고 자.’
‘그래 잘 놀다 와 조심하고.’
엄마는 항상 이렇게 말했던 거 같아요. 엄마에게 크리스마스가 있었을까요? 괜히 미안해 지내요. 올해는 엄마랑 정말 멋진 크리스마스를 만들어 봐야 겠어요. 올해가 마지막일수도 있잖아요. 항상 저에게 오늘 하루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내일이니까요.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케이크를 사가요. 오늘도 지나가는 사람들 중 케이크를 들고 가는 사람들을 여럿 봤어요. 다들 그날이 생일일까요? 빵집에는 케이크가 동나고,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요. 희한한 문화가 또 하나 생겼어요.
이제는 사람들의 발길도 뜸해진 거 같아요. 눈이 많이 오면 참 좋았는데 이제는 걱정입니다. 엄마가 아직 집에 안 왔거든요. 차들이 엉금엉금 기어가네요. 어떤 차들은 집 앞에서 연신 헛발질을 몇 번 하다가 가까스로 골목을 빠져 나가요. 마중이라도 나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요. 엄마는 혼자 있을 때는 집 앞 현관에도 못나가게 해요. 누가 절 바로 납치해 갈까 걱정 하나 봐요. 허긴 납치범이 있긴 하죠. 감기라는 납치범이요. 이렇게 눈이 오는 날 눈도 맞고 싶은데 눈을 맞아 본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 한 거 같아요. 창밖으로 손이라도 내밀어 눈을 만지고 싶지만 엄마는 뽁뽁이로 제 방 창문을 도배해 버렸어요. 그나마 작은 틈을 내서 이렇게 창밖을 바라볼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서리가 끼면 그마저도 힘들어요.
안네도 저처럼 생활했을까요? 창문 하나 없는 공간에서 13살의 나이에 어떻게 버텼을지 상상이 가지 않아요. 그래도 전 가끔씩 나갈 수 있으니 안네보다는 낫겠죠? 안네는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았을 까요? 죽음의 공포가 항상 공존한다는 것은 정말 두려움의 연속인거 같아요. 지금도 제 옆에 서서 저와 함께 구멍 난 틈 사이로 창문을 바라보는 거 같아요. 소름이 돋네요. 저도 안네처럼 되는 걸까요? 그러긴 싫은데 …….
문득 이사 오는 날 옆집 아주머니가 저를 보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길게 한숨을 쉬었던 게 생각났어요. 그리고 어머니에게 뭐라 물어보시고 난 후 돌아서서 가시면서 푸념하듯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네요.
‘젊은 나이에 다들 왜 그러는 건지. 굿이라도 해야 하나. 참나, 터가 안 좋은 건가 …….’
그때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버렸던 말이었는데, 서영이의 편지를 보면서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어요. 그리고 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해서 물어 봤을 때 아주머니가 왜 그렇게 쭈볏쭈볏 말을 못했던 것도 이제는 이해가 됐구요. 저도 그 사람처럼 운명을 맞이하게 될까요? 그러긴 정말 싫은데 말이죠.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안 좋은 생각들만 가득할까요? 남들이 행복한 시간을 보낼 때면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거 같아요. 제가 그러지 못해서 그러는 거 같아요.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과 저의 모습이 비교 되는 게 싫어요. 하루하루 죽음을 기다리는 것도 싫어요. 이렇게 오래오래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정말 회복될 수 있을까요? 다시 예전의 강정현이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모자를 살짝 벗어 봅니다. 외출할 때 이외에는 집에서 모자를 잘 쓰지 않았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집에서도 모자를 써요. 머리에 손을 갖다 댔습니다. 여전히 민머리는 어색해요. 머리카락이 사라진지도 3년이 넘은 거 같아요. 매끈거려요. 스님들이 삭발을 해도 이만큼 잘하지 못하겠죠? 더 이상 회복은 안 되는 거 같아요. 제 방에는 거울이 없어요. 거울 보는 것이 싫어 치워버렸거든요. 화장도 안하니 거울을 볼 일도 없어요. 무엇보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다른 사람으로 보이는 게 너무 싫어요. 가장 자신 있었던 모습을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속상해요. 그래도 나름 예뻤는데 말입니다. 거리를 지날 때 누군가에게 시선을 느끼는 것은 묘한 기분이거든요 기분도 으쓱해지기도 하구요. 지금도 제가 밖으로 나가면 여전히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긴 해요. 예전과 다른 시선이라서 그렇지만요. 지금은 주눅이 들죠. 피하고 싶고. 엄마가 왔나 봐요. 문소리가 들렸어요. 얼른 침대에 누워야 겠어요.
현관문이 열리고 밖에서 정현이를 부르는 고음의 밝고 명랑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정현아! 엄마 왔어.”
엄마의 목소리에도 정현이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자는 척 했다. 엄마가 정현이의 방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왔다.
“눈 엄청 와.”
엄마는 정현이에게 다가가려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엄마는 옷에 묻은 눈들을 털어 냈다. 이미 수북이 쌓였던 눈은 방안의 온도 때문에 다 녹아서 옷 속에 스며 들었다. 그래도 엄마는 신이 났는지 식탁에 놓았던 케이크를 냉장고 안에 넣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정현이는 방안에서 바깥의 소리를 들으며 엄마의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다. 엄마가 화장실로 들어가는 소리까지 듣고 나서야 정현이는 다시 일어나 뽁뽁이를 살짝 걷어 내고 창밖을 보았다.
“검사는 잘 받았냐?”
도서관을 빠져 나오며 규석이가 범수에게 물었다.
“응.”
“그래서 하기로 결정 된 거야?”
“결과 나와 봐야지. 아직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냐. 이번 검사까지 다 일치해야 기증이 가능하다고 하더라구. 나오면 연락 준다고 했으니 기다려 봐야지.”
범수는 지난주에 받았던 결과 소식이 궁금해졌다.
“생각보다 쉽지 않네. 그걸 미리 뽑아 놓고 헌혈처럼 보관하면 안 되는 가봐.”
“보관이 쉽지 않나봐. 그리고 무엇보다 일치 확률이 적으니 골수를 뽑아 놓고도 일치하는 사람이 없으면 폐기해야 하잖아.”
“그러겠네. 암튼 그럼 오늘은 술 한 잔 해도 되냐?”
규석이가 술이 당기는 지 범수를 은근히 졸랐다.
“야, 넌 술 고픈 사람이라도 되냐? 그나저나 오늘 면접 본 건 어떻게 됐냐?”
“보긴 잘 봤는데 결과 기다려 봐야지. 되면 좋고. 안되면 뭐 다른 곳에도 여럿 넣었으니 기다려 봐야지.”
규석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나쁘게 보지는 않았나 보네.”
“암튼, 날이 날이 잖냐. 연말이고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 이 형아 오늘 면접도 봤겠다. 한잔 하자! 외로운 널 위해서 먼 곳까지 이리 찾아 왔는데.”
규석이는 도서관에서부터 범수를 계속 꼬드겼다.
“야, 나 너 말고도 만날 사람 많거든.”
“가영이?”
범수의 말에 규석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빠르게 물었다.
“인마, 갠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범수가 규석이를 한 대 칠 것처럼 하며 말했다.
“너 지금 행동 보니 더 의심 가는데? 그럼 나 소개시켜 주면 어떠냐?”
규석이가 범수의 손짓을 피하며 능글맞게 말했다.
“오늘 면접 보면서 무슨 일 있었냐? 너 정현이 있잖아. 왜 이제 잊었어?”
“아니, 니가 사귀기 싫으면 나 소개 시켜 주라고. 맘에도 없는데 왜 소개는 안 시켜 주는데?”
“정현이는 다 정리한 거냐고?”
규석이의 말에 범수는 재차 물었다.
“모르겠다. 생각은 계속 나긴 하는데 찾을 방법은 없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리는 게 맞는 건지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만나면 좀 잊혀질까 해서.”
“갠 아냐. 독신주의야.”
규석이의 말에 범수가 단정 짓듯이 말했다.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지난번에 결혼식 갈 때 그리 말했으니까.”
“야, 그런다고 평생 그렇게 사는 사람이 어딨냐? 넌 정말 답답하다.”
규석이가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범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냥 갠 친한 동생이야.”
범수는 더 이상 뭐라 말하기가 그래서 대충 얼버무렸다.
“야, 그러지 말고 시간 되면 같이 오늘 보자고 하면 어떠냐? 그럼 자연스럽게 만날 수 도 있고. 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한번 슬쩍 떠 볼 테니까.”
규석이의 말에 범수는 혹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여전히 싱글벙글 입니다. 전 그런 엄마의 행동을 계속 바라만 봅니다. 평소 엄마답지 않네요. 직장에서 좋은 일이 있었나봅니다.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 식탁위에 올려놓습니다.
“엄마,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븐데?”
“알아, 그냥 오늘 하고 싶어서.”
“뭐 좋은 일 있어?”
“응, 아주 좋은 일이 있지.”
엄마는 정현이를 바라보며 웃기만 했다.
“무슨 일인데?”
“일단 케이크에 초부터 키자.”
엄마는 상자에서 케이크를 꺼내 초 두 개를 꽂고 촛불을 켰다. 그리고는 주방과 거실 불을 껐다. 촛불 두 개가 주방과 거실을 비추었다.
“우리 소원 빌까?”
엄마는 눈을 감았다. 정현이도 눈을 감았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같이 끄는 거야. 하나, 둘, 셋!”
정현이의 입에서 가는 바람이 나왔다. 이제 엄마의 도움 없이는 촛불 끄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엄마는 주방과 거실의 불을 켜고 초를 뺐다.
“자, 케이크는 나중에 먹고 밥 먹자.”
“이제 무슨 일인지 말해줘?”
정현이는 더 이상 궁금해서 못 기다리겠는지 엄마를 졸랐다. 엄마는 잠시 뜸을 들이며 정현이를 바라 봤다.
“정현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너 하고 골수가 맞는 사람이 나타났대.”
엄마가 정현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현이는 한동안 엄마를 바라봤다. 눈에는 눈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엄마, 정말이야?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응, 정말이고말고. 아까 병원에서 연락이 왔어. 일치자가 나타났다고.”
엄마도 눈물을 흘렸다.
“엄마, 그럼 나 살 수 있는 거야? 나 이제 학교도 다시 가고 친구들도 만날 수 있는 거야?”
정현이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 울먹이며 엄마에게 물었다.
“그럼, 그럴 수 있지. 이제 모든 게 잘 될 거야. 걱정 안 해도 돼.”
엄마는 정현이의 곁에 가서 정현이를 안았다.
“엄마, 나 살고 싶어. 정말 살고 싶었어.”
정현이는 그동안 가슴 속에 묻어 두었던 말들을 엄마의 품에 안겨 쏟아 냈다.
‘하나님, 이게 꿈은 아니죠? 정말 감사해요. 저 열심히 살게요. 엄마도 잘 모시고 살게요.’
정말 믿어지지 않을 기적이 찾아 온 거 같아요.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게 이런 거겠죠? 어렸을 때 산타할아버지를 믿었던 이후 오늘 다시 산타할아버지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누굴까요? 저에게 골수를 기증해 줄 사람은 어떤 천사 같은 사람일까요?
몇 번의 항암치료와 약물치료로 나을 거 같은 병은 끝내 완치가 되지 않았어요. 참 병이 질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혈액 암은 저를 떠나지 않고 계속 더 집요하게 괴롭혔던 거 같아요. 의사선생님이 골수기증을 받아보면 어떻겠냐고 했을 때 기대를 하지 않았어요. 일치자가 나타날 확률이 너무 적었으니까요. 엄마는 자식이 나 하나인 것에 대해 후회를 많이 했었죠. 이제 제 삶은 다 끝나나 싶었어요. 골수기증을 받는 다는 것은 더 이상 치료로는 완치가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삶의 희망을 잃어갈 즈음 들린 소식은 저에게는 생명의 빛과 같은 소식이었어요. 비록 그것이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말이죠. 놓치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 해서든 잡고 싶어요. 오늘은 긴 밤이 될 거 같아요. 그 옛날 밤새워 놀았던 그 시절처럼 밤을 홀딱 샐지도 모르겠어요. 오늘의 시간이 멈춰져 버렸으면 싶네요.
크리스마스 연휴가 지나고 정현이와 엄마는 병원을 찾았다.
“너무 늦지 않게 기증자가 나타나서 정말 다행이네요.”
의사는 정현이와 엄마를 보고 다정히 말했다.
“그럼 바로 진행하는 건가요?”
엄마가 급한 마음에 의사에게 물었다.
“아뇨, 일단 상대측도 준비 과정이 있구요. 환자도 무균 실에서 기증받을 준비를 해야 해요. 아마 한 한 달에서 두 달 정도 후에 가능할거 같습니다. 일단 기증자의 일정도 확인하면서 진행을 해야 해서 저희도 우선 준비는 해 놔야 할 거 같아요.”
의사는 침착한 어조로 정현이와 엄마를 번갈아 보며 설명을 했다.
“그럼 입원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건가요?”
정현이는 입원하는 것이 싫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기증 일정이 잡히면 저희가 다시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입원 기간은 기증 전 후로 해서 한 두 달 정도는 예상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자세한 것은 설명 간호사가 따로 또 말씀 드릴 겁니다. 축하해요. 건강관리 잘 하고요.”
의사는 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정현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영이라는 사람에게서 편지가 왔어요. 또 잘 못 보냈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정준호가 아닌 강정현이라는 이름으로 보냈어요. 제 편지를 읽었었나 봐요. 그런데 왜 한 참이 지나서야 편지를 보냈을까요? 궁금한 마음에 얼른 편지를 뜯었습니다. 역시 새로운 사람이 생긴 게 맞았어요. 그리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고 하네요. 잘 된 거죠? 예상대로 준호와는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었다고 하네요. 그러다 갑작스런 죽음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고 한동안 우울증과 대인 기피증도 있었다고 해요. 그 심정 저도 이해해요. 비록 상황은 다르지만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러다 우연히 지금의 결혼할 남자를 만나면서 상처가 많이 치유 됐나 봐요. 살짝 부러웠어요.
그런데 막상 이 사람과 결혼을 하려고 하니 준호가 많이 생각났나 봐요. 미안한 마음도 있었구요. 그래서 그리운 마음에 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었다고 하네요. 그러면 좀 마음이 편해질 거 같았나 봐요. 하지만 생각만 그렇고 마음은 여전히 그러지 않았다고 하네요. 생각할수록 더 그립고 보고 싶었나 봐요. 정말, 정말 사랑 한 거죠? 저도 갑자기 규석이가 보고 싶어지네요.
편지 쓰는 걸 포기하려고 하는 차에 저에게서 연락이 왔었데요. 제가 쓴 편지를 보지도 않고 휴지통에 버렸었는데 어느 날 휴지통에 있는 제 편지가 보였대요. 참 신기하죠? 몇 달 동안 휴지통을 안 비웠나 봐요. 아무튼 저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졌다는 말에 공감이 되었데요. 답장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보냈다고 해요. 그동안 생각이 많았나 봐요. 하긴 저도 그랬으니 까요.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참 어색하면서도 이상해요.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도 고민이거든요.
사랑은 잊는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네요. 그냥 덧칠을 하는 거래요. 왜 이 말에서 가슴이 먹먹할까요? 한동안 말없이 닫힌 창문을 바라만 봤어요. 또 눈물이 나네요. 바보같이. 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규석이도 지금쯤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까요? 한동안 보지 않던 메일을 열어 봅니다. 잡초 사이에서 꽃을 찾듯 스팸 메일 가운데 규석이의 메일을 찾았어요. 시간이 규석이를 변하게 한 거겠죠? 마우스를 갔다 댔다가 다시 멈춥니다. 아직은 규석이의 메일을 열어볼 용기가 안 나네요.
엄마의 방 화장대 앞에 앉아 봤어요. 몇 년 만에 거울 앞에 앉았습니다. 휑한 눈에 야윈 얼굴을 한 여인이 절 바라보고 있네요. 저도 모르게 화장을 하고 있네요.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한다고 하는데 전 지금 누구를 위해 화장을 하고 있는 걸까요? 다시 만날 수는 있는 걸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