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한량 Mar 23. 2020

추억은 액자에 담긴 사진 같아

눈 앞에 봄

추억은 액자에 담긴 사진 같아. 기억이 추억이 되는 순간, 결부된 감정의 크기에 비례하는 액자를 골라 입고 과거라는 벽에 촘촘히 자리를 잡는 거야.


물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해 맹탕이 된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아일랜드 식탁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데, 창가 쪽 소파에서 그녀가 말을 건네 온다. 책을 읽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부터 딴생각 중이었을까.


벽이 엄청 커야겠네.


니맛도 내 맛도 아닌 커피보다 재미있는 발상에 귀를 기울여본다.


그렇지. 액자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늘어나기도 하고 1년에 한두 개가 걸릴까 말까 하기도 해. 그래도 너나 나나 서른이 넘었으니 숫자가 상당하겠지.


밀려나는 경우도 있나? 자리가 부족해서 벽에서 내려야 되는?


그녀가 앉은 소파 옆에 슬쩍 자리를 잡자 그녀가 자연스레 내 손에서 머그컵을 받아들어 입에 가져가더니 미간을 들어올리며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게, 맛없다니까.  


글쎄, 내가 생각하기엔 그냥 찾기 나름인 것 같아. 무빙워크에 올라타 인터넷 검색하듯 키워드를 입력하면 키워드와 연관 있는 액자 앞에 서는 식인 거지. 무빙워크를 타고 가는 길에 생각지도 않던 추억들을 보게 되기도 하고. 왜, 몇 년 만에 생각지도 않던 기억이 툭 떨어질 때 있잖아.  


재밌네. 근데 갑자기 웬 추억 타령이야?


그냥. 생각나서. 지나간 봄날이.  


그리고 그녀는 말을 멈춘다. 커피를 슬그머니 다시 내 손에 쥐어주는데, 이미 시선은 저 먼 곳에 가있다. 뭐야 대화를 하다 말고. 얼핏 퉁명스럽게 중얼거렸지만 어쩐지 웃음이 난다. 그녀는 아마 커다란 벽 한가득 담긴 봄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이리라.  


봄날이라.


햇살이 드리운 창가에 시선을 내려놓고, 나 또한 무빙워크를 타고 벚꽃이 넘실대는 봄날을 지난다. 벚꽃, 목련, 개나리, 진달래 꽃밭을 지나 천천히 이동하던 무빙워크는 봄의 첫날 앞에 멈추어선다.


입춘.


싱그럽게 웃는 당신과 함께 눈이 녹는 대학가를 걷는다. 묵은 눈이 녹았다 거듭 얼어붙어 견고하게 다져진 빙판은 오늘 하루 단번에 녹아내리기 위해 몸을 만들어온 것이었나 보다. 너와 나는 3일 간격으로 꽃피는 춘삼월에 태어난 봄의 아이들. 방학 중 학교에 들렀다 우연히 만났지만, 그 날을 우리가 함께 축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만 같다.


찬란한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거리. 어쩐지 영화 ‘졸업’에서 붉은 색 컨버터블을 타고 화창한 날 금문교를 건너는 더스틴 호프만이 된 기분이다. 이대로 현실에서 도망쳐 우리만의 세계로 떠날 수 있다면.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Mrs. Robinson을 흥얼거리며 영화 졸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정말 그런 결말이란 말이야? 말도 안 돼 나도 보고 싶어, 라며 폴짝폴짝 뛰어대는 당신은 나만큼이나 들뜨고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너는 나에게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았던가.


입춘 뒤에는 우수가 온다.


봄에 대한 기대도 잠시, 한차례 비가 내리고 나면 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찾아오고 입춘의 희망은 그대로 사그라들고 만다. 사라지고 말 것이기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봄의 첫날의 기억에 네가 있어 나는 너를 지울 수가 없는 것이리라.


너의 봄날에는 어떤 액자들이 걸려 있을까. 여름을 좋아하는 네게 봄날은 여름으로 향하는 순례길 같아서, 가는 발걸음 하나하나 보이는 풍경이 소중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렇게 봄으로, 여름으로 향하는 기억을 더듬다 보면, 가는 길목에서 오늘 내가 너를 만난 것처럼 너도 나를 만나는 날이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어느 밤의 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