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ny Choi 메덴코 Mar 01. 2023

퇴사를 앞둔 지 한 달, 다시 오퍼를 받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덴마크의 많은 회사들이 퇴사할 때 'Calender Month'를 따른다. 즉 2월 말까지 근무를 할 예정이라면 늦어도 1월 31일까지 확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약 2월 1일에 퇴사 의사를 밝힐 경우, 앞으로 한달인 3월 1일이 아닌 3월 31일까지 근무를 해야 한다.


내 경우가 그런 케이스다. 상사는 1월 31일까지 나의 퇴사일에 대해 묵인했었고 2월 1일이 돼서야 3월 31일까지라는 새로운 계약서를 다시 작성했었다. 물론 그녀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3월 중순에 일주일간 아주 중요한 국제 행사가 있는데, 그걸 끝낼 때까지는 내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걸 알고도 내가 3월까지 근무하기로 한 이유는 함께 일하는 동료 때문이었다. 아니 동료를 위해서였다. 함께 맡고 있는 프로젝트를 혼자 떠맡기고 싶지 않았고,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시작한 일은 끝내고 나오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내가 착해서 혹은 착한 척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고, 그 동료를 너무나 좋아해서도 아니다. 만난 지 몇 달 안 된 동료에게 애정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단지 내 신념이고 일하는 태도 때문이었다. 제대로 끝내고, 끝을 잘 맺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기 때문이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어쩌면 평생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들이 있다. 갓 20살이 됐던 무렵, 고급 중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너무 힘들어서 관두고 싶은데 말을 도무지 할 수 없어서 부모님이 대신해 주신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하루 만에 너무 힘들어서 죄송하다는 장문의 편지를 남기고 도망친적도 있다. 어리석고, 어리고, 바보 같았던 지난날 덕분에 나는 그 이후로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어른이니까, 어른답게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고 도망치지 않기로. 그 후 단 한 번도 조직 내에서 말 없이 책임감 없이 도망치지 않았다. (혹여나 기억이 잘못 되지 않았길. 제발 없길 바란다. 혹시 있는데 모르는 거면..그렇게 살면 안되기에)


심지어 덴마크 이민 전, 코로나로 국경이 닫혔다 잠시 국경이 열렸던 때가 있었다. 또다시 언제 닫힐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당장 마음 같아선 회사를 그만두고 덴마크로 오고 싶었지만 업무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나는 모든 일을 끝내고 제대로 퇴사를 하고, 모두와 웃으며 울면서 안녕을 했었다. 그래서 덴마크에서도 나는 그러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아무리 비합리적인 이유로 퇴사를 강요받았지만, 그래도 내가 하던 프로젝트를 잘 마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동료들은 오히려 내게 법적으로 병가를 6개월이나 낼 수 있으니 차라리 병가를 내고 회사에 엿을 맥이라고도 했고, 갑자기 병가 내고 행사에 불참하라고도 했다. 아무리 상사가 싫고, 회사가 미워도 비도덕적이고 싶지 않아서 괜찮다고 했다. 그런 나를 대단하다며, 존경하는 동료들도 있고 미련하다고 하는 동료들도 있다.


얼마 전 알게 된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해줬다.


지금 너무 힘들어도 미래의 언니는, 지금의 언니에게 고마워할 것 같아요.

나는 이 말이 굉장히 와닿았고, 무척 힘이 되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스스로 떳떳하고 당당할 테니. 나 스스로 뿌듯하고 잘한 결정이라고 결국 느낄 테니 말이다. 이 친구 말처럼 이렇게 묵묵히 걸어온 나의 길과 노력을 알아주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회사에서 정말 좋은 동료들을 많이 만났다.


내 퇴사 소식을 팀원들에게 알리던 날, 내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열정이 있어야 해요. 써니는 이 일에 열정이 없어서 떠나기로 합의 봤어요."


이 말을 들은 모든 팀원들은 경악했고, 무슨 매니저가 저렇게 말을 하냐며. 그리고 마치 온전히 나의 결정으로 퇴사를 하는 것처럼 말을 하는 매니저의 모습에 화가 난 동료들은 나를 대신해서 HR에 고발도 해주었다. (물론 바뀐건 하나 없다. 조직 자체가 참 그렇다 이곳이..) 나 대신 더 속상해하던 동료들은 사내에 오픈 포지션을 나보다 더 열심히 찾아주었고, 본인들의 네트워킹을 이용해서 타 기업 다른 포지션에 나를 주선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요즘 함께 한 번이라도 협업했던 사람들에게 점심 요청을 해서 1:1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그중 한 분은 경력 35년이 넘은 50대 후반의 미국인 카피라이터다. 그는 내게 진지하게 뉴욕에 갈 생각이 없냐 물으셨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하시냐 물으니 덴마크는 너무 나를 담기 좁고 작은 나라라고, 혹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으면 연결해 주겠다고 그리고 그런 상사 밑에서 6개월을 보낸 나를 칭찬해 주라고 하셨다. 나의 잘못이 아니라고, 운이 안 좋았을 뿐이라고.


다들 내게 그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뭘까 싶어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물었는데 다들 한결같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우리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정말 책임감 있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껴서예요. 힘든 상황에서도 웃으면서 묵묵히 어쨌든 할 일을 하는 게 너무 인상 깊어요. 꼭 다시 같이 일하고 싶어요."


그렇게 나는 천천히 퇴사를 준비하며 앞으로 어떤 기회를 만들지 고민하던 차, 시카고 출장에서 돌아온 동료 한 명과 점심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써니, 우리 팀에서 나랑 일 안 해볼래요? 저한테도 매니저로서의 기회를 한번 주는 건 어때요?"


매거진의 이전글 해고가 너무 쉬운 나라 덴마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