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부엌엔 썰다 만 무가 놓여 있었다. 어느 일요일 저녁 느닷없이 찾아간 그녀의 집은 하얗고 따뜻했다. 우리는 부엌 한 켠 아일랜드 식탁에 걸터 앉아 도란도란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만난 친구처럼 깔깔 거리며 웃으며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지난 수요일에도 같이 앉아 밥을 먹었지 우리가.
언제 만나도 좋은 사람,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기미가 좀 올라와도 심지어 눈썹을 그리지 않아도 거뜬히 만날 수 있는 사람. 웃을 때 눈을 반쯤 감으며 반달 눈을 만드는 사람. 싫은 것은 “너무 싫어 , 어 , 너무 싫어, 너무 싫어” 세 번 씩 말하는 사람. 빨간색 털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사람. 요란하게 말하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사람. 내게 친언니가 있었다면 꼭 이런 언니 였으면 좋겠다 싶은 나의 친구. 그냥 좀 잘 아는 동네 언니.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자연스럽게 좋아 하는 책 이야기, 작가 이야기, 문장 이야기를 하다가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의 아이들은 이따금씩 옆에 앉아 저들 만의 책을 들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그녀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찾는 책을 향하여 허리를 반쯤 숙이고 온 책장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서재에, 자기 손으로 고른 책을 낯선 곳에 온 표정으로 고르고 있었다.
그녀의 서재는 굉장했다. 까뮈부터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거쳐 인디언 산문집까지 장르불문, 시대불문, 철학, 음악, 미술, 한자에 프랑스어까지 모든 것을 잡고 싶어 했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애틋했다. 마치 그녀의 삶 같았다. 버릴 것이 없이 움켜쥐고 있는 삶에 대한 열정 같은.
그녀는 항상 친절하고 어여쁘다. 늘 바쁘기 까지 하지. 바느질도 해야 하고 자수도 놓아야 하고 뜨개질로 가방도 만들어야 하고, (아, 러시아 여자에게서 패턴도 사야한다 ) 그림도 그려야 하고,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 다녀야 하고, 비록 친구는 세명밖에 없지만 그 와중에 책도 읽어야 하고, 영어 공부도 한다. 게다가 돌보아주어야 하는 아이가 둘. 항상 툴툴 대며 바쁘고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가며 뜨개질을 하지만 금새 차가운 아메리카노 한잔에 벌떡 일어나 할 일을 해내고 마는 천하무적 슈퍼우먼 심미리 여사
대학을 졸업하고 줄곧 간호사로 일했지만 병원 이야기는 질색, 결혼 10년차지만 기혼인지 미혼인지 밝히는 것 싫음. 식당에 주문 할 때 항상 과하게 시켜 말려야 하는 사람. 하지만 정작 배는 제일 빨리 부르지. 일년내내 따뜻한 음식을 좋아하고 시끄럽고 더러운 것을 싫어 하는 내 친구 심여사 오래오래 행복했으면 좋겠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큰 것에 덤덤하며 어떤 일이라도 깔깔거리며 웃는 것을 좋아하는, 그러나 예민한 이 언니가 정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 늙어서 서로 흰머리 세는 걸 웃어가며 살았으면 좋겠다 가까운 이웃에서. 이렇게. 서로 다독 거려주며. 동네 스타벅스에서 우연히 만나면서.
그녀의 집에 소고기 무국은 지금 바글바글 끓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