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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Oct 20. 2023

발도 말할 권리가 있다


“엄마 자는 시간이잖아. 조용히 좀 해 제발”


  목요일 오후 네 시경. 이른 새벽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은 천근만근이고 입을 뗄 기운도 없었다. 하루 종일 아픈 환자들과 시름을 하고 돌아오면 온몸의 에너지가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떡실신. 하교한 아이들이 집에 돌아오면 소리에 예민한 나는 야단을 쳤다. 도시에서 살 때는 그러니까 맞벌이 부부에 직장맘이던 시절 교대 근무 때문에 아이들을 채근하는 일이 많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엄마와 이야기할 시간을 빼앗기고 혼자서 조용히 그림이나 그리며 놀아야 했던 그때 아이는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남해에 와서 우리 가족이 더 잘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마당에 나와 BBQ를 해 먹고 캠핑 의자에 기대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 작은 이벤트는 어쩌다 우연히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시장에 가서 숯불용 고기를 사고, 텃밭에서 상추를 따고 씻고, 장작을 쪼개고 햇볕에 널어 말리고, 인터넷으로 스파클러를 주문하고, 화로에 구울 수 있는 고구마도 준비하고 은박지에 싸고 마시멜로와 꼬챙이도 준비하는 과정은 시간을 가지고 미리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 이 수고로운 일들을 기꺼이 마치 지난날의 과오를 속죄하는 마음으로 준비한다.

  햇볕에 바짝 말려놓은 나무는 탁탁 소리를 내며 봄밤에 울려 퍼진다. 고요한 봄밤. 네 명이 둘러앉아 소란스러운 밤. 저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은 시골 학교에서 경험한 것이 많기도 하고, 내가 혹은 남편과 내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만큼의 마음의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좀 이야기하자. 누나 아까 했잖아. ”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은지. 두 아이가 자꾸만 발언권을 두고 소란스럽다.


“발언권을 얻은 사람이 이야기해야지”

“엄마 발언권이 뭐야?”

“발언권은 발표할 때 발(發), 말씀 언(言) 아니, 발도 말할 권리가 있다. 지금부터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발을 들어주세요”


  한자 공부를 하는 둘째 아이에게 풀어서 설명해 주다가 갑자기 장난을 치고 싶어졌다. 한참을 깔깔 웃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높이 든다. ‘저요 저요’ 얼굴 높이까지 올라간 발이 우습기도 하다. 갑자기 생겨난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아무도 저항감이 없다. 발을 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진지모드 아빠에게도, 예민 보스 엄마도 모두에게 공평하다. 엄마의 잔소리도 발언권을 얻은 다음 말할 수 있다. 아이들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끼어들기 위해 더 높이 발을 든다. 이쯤 되면 발을 들고 싶어서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발을 드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이렇게 발언권을 얻기 위해 치열한 남해의 봄밤은 깊어져 간다.

 

  아이들은 이 시간을 기억할 것이다. 느리게 지나가는 시골 마을의 시간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마음속에 기억될 것이다. 하교 후 돌아온 아이가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을 텐데 삶에 지쳐 조용히 하라고 다그쳤던 지난날의 나를 원망하고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남해가 없었더라면 그 시간이 잘못되었던 것조차 모르고 계속해서 반복하는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그런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도 나를 돌아보고 단련해 나갈 뿐이다. 남해가 없었더라면, 시골집 마당이 없었더라면, 내 삶에 쉼표가 없었더라면, 내가 잠시 일을 쉬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이 시간이 없었더라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마음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오늘도 주말에 있을 BBQ와 불멍을 준비한다. 원시 부족처럼 또 불 앞에 둘러앉은 우리는 히사이시조의 연주음악을 들으며, 발언권을 두고 누가 더 발을 높이 드나 경쟁하게 되겠지. 어느 가족의 이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다면 OO 리로 와도 좋다. 물론 이 원시부족의 이야기에 끼어들려면 발언권을 얻는 치욕은 감수하여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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