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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싱클레어 Oct 20. 2023

아마도 환타

나도 가끔 동네 책방의 주인이 되고 싶다

  

  “경남님. 내일 책방 열어 주시는 거 맞죠? 답장 한 번만 부탁드려요.” 금요일 밤 22시경. 내일 책방의 일일 알바가 되기로 한 달 전에 약속했는데, 진땀이 나는 엉망진창 일과에 글쓰기 모임마저 늦어져 책방 사장님께 답장조차 하지 못했다. 난 정말 이런 사람이 아닌데.. 차를 갓길에 세워 두고 비상 깜빡이를 켰다. 급히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해요 제가 오늘 너무 바빠서 답장을 했다고 생각해 버렸어요. 오늘 실수한 만큼 내일 잘해볼게요’ 책임감의 무게일까. 밤새 뒤척 뒤척 편치 않게 선잠이 들었다.     


  오늘은 남해군 삼동면 지족마을 ‘아마도 책방’에서 일일 책방지기가 되기로 한 날이다. 돈을 받고 하는 아르바이트와 달리 책방이라는 공간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이 사장님께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고 하루 동안 책방지기 체험을 할 수 있다. 언젠가는 좋아하는 책에 파묻혀 나의 서가를 좋아해 주는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며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는 책방 주인이 되는 날이 올 수도 있지 않은가.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똘똘한 알바생이 되고 싶었던 나는 사장님의 메모도 꼼꼼히 몇 번이나 읽고, 읍내에서 아이스티에 샷추가까지 해서 30분 정도 여유롭게 도착했다. 서가의 책도 미리 확인하고 찾는 책을 골라주기도 해야지 했던 꿈은 도착과 동시에 사라졌다. 세상에 입구 문 여는 것부터 버벅거리고 있다. 매장은 총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데 일단 모든 불을 켜는 것부터가 미션이다. 여기 있을 것 같은데 없고, 여기에는 없을 것 같은데 있다. 이사 몇 번에 살림 경력이 얼만데 불 켜는 것조차 못 하고 있다니... 내 키보다 더 높은 책장들 사이를 째려본다. 좀 나와라. 스위치야. 제발. 대문 앞에 입간판도 못 세웠는데, 그때였다. 짤랑짤랑 입구에 달아 놓은 작은 종이 문 열림과 동시에 울린다. 손님이 들어오셨다.    

 

"어서 오세요"     


  간호사실 데스크 경력으로 노련하게 반응한다. 이미 들어왔는데 나가라고 할 수도 없다. 아직 대낮이라서 불 안 켜진 것 정도는 눈치 못 채 신 것 같다. 목이 바짝바짝 탄다. 아마도 더운 날씨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닐 테지. 손님은 책을 찾아 두리번 나는 어쩔 줄 몰라 일어섰다 앉았다. 컵을 들었다 놓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아샷추 3분의 2쯤 사라졌다. 책방 오픈 15분 만의 일이었다.     

  2-6시까지 영업을 하기로 했다. 한 시간가량 지났을까. 책을 넣어 주는 중간 크기의 종이봉투가 모자라다. 사장님께 급하게 문자를 보내었다. 서울에서 북페어 참가 중이신데 남해의 어리바리 알바생 때문에 전화기 붙들고 계신 듯하다. 종이봉투는 다른 곳에 있어서 찾기가 어렵다고 연락이 왔다. 다른 크기 봉투에 넣어야겠다.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다. 내가 아마도 책방에서 구입했을 때 사장님께 받아서 기분 좋았던 대로 명함과 스티커도 넣고 도장도 찍어주었다. 잠시 후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경남님, 혹시 봉투는 100원에 유상판매인데 봉투를 찾으시는 분이 그렇게 많으신가요?"     

  아뿔싸, 유상판매였는데 이렇게 퍼다 주다니. 모자랐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똘똘한 알바생이 되고 싶다’ 했는데 젠장이다. 영락없이 어리바리가 되었다. 어디라도 숨고 싶다.     

  작은 시골 마을 책방에 손님이 무수히도 들어오신다. 어디서 오셨는지. 어떤 작가를 좋아하는지. 이 책은 읽어 보셨는지. 준비한 말을 건넬 겨를이 없다. 입 다물고 책만 팔고 있다. 단내가 나는 것 같다. 아샷추는 벌써 동이 났다. 속 타는 마음에 얼음까지 다 씹어먹었다. 이때 불현듯 드는 생각.     


'아 맞다. 나 환타지.'     


  잊고 있었다. 병원에서 환자를 탄다는 의미로 선배님들이 그렇게 불렀다. 수년간의 경험으로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stable 하던 곳도 나만 근무에 들어가면 응급 call이 터지고 없던 당직도 생겨나고, 근무지를 옮겼지만 icu환자가 검사를 하겠다고 주렁주렁 배액관을 달고 침대 채로 줄줄이 내려오고, order는 넘쳐나서 늦은 시각까지 환자를 봐야 하는 '나는야 환타'. 심지어 동명의 음료도 안 먹는데.... 잊고 있었다. OMG. 이런 내가 책방 사장이라는 맹랑한 꿈을 꾸다니. 내가 생각한 동네 책방지기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고...     


  종료 30분 전 드디어 짬이 났다. 가까스로 블루투스에 음악을 연결했다. 듣고 싶은 음악 실컷 듣고 LP도 듣고 맛있는 간식도 먹고, 책도 마음껏 읽고, 창밖의 지루한 풍경도 보고, 고양이들과 술래잡기도 하고 싶었지만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음악 한 곡 듣고 서가의 책을 살피고 있으니 이제 곧 마칠 시간이다. 상상하던 시골 마을 책방지기 로망은 처참히 부서졌다. 12팀의 매상을 올리고 마지막 13번째 손님은 내가 되어 읽고 싶던 책을 구입했다. 영업을 종료하고 돌아가는 길 아름다운 지족항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차를 세웠다. 이제야 바닷바람이 느껴진다. 반나절 고단한 알바가 끝났음을 알리는 듯하다. 때마침 이 모든 것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딸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 서점 알바 잘 마쳤어?"     

"응. 이제 마치고 가는 길이야. “     

"엄마 알바비 받았어? 그럼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딸아이의 애교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갔다. 밥 할 기운도 없는데 잘 되었다.     


  알바비를 내고, (-27,000) 아샷추를 사고(-3,400) 자가용을 타고 가서 (-10,000) 노동력을 제공하고, (-9,620*4hr) 책도 구입했다.(-50,600) 하루 종일 엄마의 부재에 아이를 봐준 남편과 아이들에게 맛있는 식사를 사는 것으로 하루를 마쳤다.(-32,000) 총 –161,480원.     

왜 이렇게 헛웃음이 나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묘한 알바다. 그래요. 저 환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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