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은 도쿄로 정했다. 엄마와 남동생과 사는 작은 아파트를 벗어나고 싶었다. 일본어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오로지 도쿄만 생각하고 히라가나를 외웠다. 그렇게 공부한 지 6개월 드디어 도쿄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직장 생활도 처음이었는데 거기다가 낯선 동네에서 홀로살이, 6개월간 배운 언어는 초등학생 정도 수준이었을까. 모든 것이 어려웠다. 은행 계좌 만들기, 부동산 계약하기, 핸드폰 만들기, 근로 계약서 작성하기, 일본어로 진행되는 회의도 참여해야 하고 거기서 무수히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오면 내가 할 일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먹고 입고 자는 모든 것을 내가 정해서 해야만 했다. 도쿄에 오기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엄마의 품 안에 했던 모든 일이 도쿄에 오고 나서 낯설게 느껴졌다. 그곳에 가면 그곳에 가기만 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되지 못한 외노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서 씻고 아침밥을 조금 먹었다. 근무지는 도쿄 도심. 월세가 비싸 전철로 한 시간 거리의 외곽 지역에 낡은 아파트를 얻었다. 매월 내야 하는 월세는 6만 3천엔. 그래도 도쿄 23구 안에 집을 얻었다는 보람이 있었다.
7시쯤 전철에 오르면 벌써 전철은 벌써 만원이다. 타카시마다이라역에서 스가모역까지 직행 20분. 다시 초록색 야마노테선을 타고 신주쿠-시부야-에비스역을 지나는 순환선을 타고 30분이면 시나가와역에 도착한다. 시나가와역에서 다시 도보로 20분을 걸어야 내가 일하는 빌딩으로 갈 수 있다. 가는 길에 역사 2층과 연결된 세븐일레븐에 들러 종일 마실 차나 커피류 간식거리를 산다. 아침 식사용 삼각김밥을 사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나가와 빌딩 숲을 거쳐 자신의 건물로 귀신같이 사라져 들어간다. 다시 한번 사람들을 만나는 점심시간 빌딩 사이사이 별사탕처럼 박혀 있는 편의점에 도시락을 사러 간다. 퇴근 시간이 되어서 다시 나오면 또다시 밀려드는 사람들 틈으로 ‘딩동’ 거리는 발차음을 뒤로하고 지하철에 올라 같은 루트로 귀가한다. 저녁을 챙겨 먹고 아까 낮에 메모해 두었던 일본어를 찾아보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구를 그리워하다 인터넷 전화기로 전화를 건다. 고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한 날이면 더욱더 말할 수 없는 공허한 기분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몰려왔다.
그렇게 지낸 시간이 2년 반 ‘이제는 조금 더 눈을 붙이자’ 타협하여 아침에는 여느 일본인처럼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샌드위치 빵, 하와이안 무스비를 돌아가면서 샀다. 삼각김밥은 170엔이고 하와이안 주먹밥은 230엔인데 밥양도 많고 스팸도 한 조각 들어 있어서 훨씬 든든하다. 이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조금 늦게 가면 벌써 매진 조금 일찍 가는 날은 살 수 있었다.
한국에서 온 이십 대 초반의 커리어우먼이라고 단단히 나를 포장하며 살았다. 퇴근길에 일본인 동료들과 이자카야에 가서 생맥주를 마시고 휴일에는 도쿄 여행 도서를 보면서 근교든 도심이든 구경 다니기에 바빴다. 우에노 공원의 벚꽃 놀이를 본 것도 그때이고 여름밤을 수놓은 오하나미(불꽃놀이)를 보는 것도 즐거웠다. 가을엔 단풍이 아름다운 공원으로 미술관으로 다녔고, 겨울엔 자연눈으로 만든 스키장에 스키를 타러 다녔다. 한국보다 설질(雪質)이 좋고 매끈 하지만 가격은 오히려 저렴했다. 하지만 언제든지 비자가 갱신되지 않으면 돌아가야 하는 외노자의 신세가 처량했다. 관광객도 아닌 것이 현지인도 아닌 것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다. 친구와 편하게 수다를 떨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하려면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일본어 작문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마음이 처량했다. 복잡한 마음은 간단하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더 멀게만 느껴졌고 첫 직장 생활과 외국 생활과 이민자의 고단함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역시나 작은 경쟁을 시작했다. 하와이안 무스비를 손에 넣은 날 “요시, 오늘은 재수가 좋았어. 먹고 싶던 주먹밥을 얻다니!” 그날 나는 일찍 나와 운수 좋게 주먹밥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그렇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런 미련 없이 부산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