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하고 냉혹하다 할 수 있지만
어떤 죽음은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놓곤 한다. 내겐 특히 세 번의 죽음이 그랬다. 삼촌의 죽음, 친구의 죽음, 사촌언니의 죽음.
그들의 기일이 다가올 때면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한 감정이 불쑥 올라오곤 한다. 상실에 낙담하고 사라진 익숙함에 슬퍼하면서도 여전히 숨 쉬고 있는 내 몸뚱아리가 미웠고 그 미움이 미안함이 됐다.
어제는 사촌언니의 기일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덤덤해지는 나를 보며 불안했다. 언니를 잊은 건가, 이제 나는 언니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 걸까 하고. 언니를 평생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언니의 죽음을 잊어버린 것만 같아 언니에게 미안했다. 더 이상 울지 않는 나를 원망하고 또 다그치기도 했다.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언니를 기억하고 애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지 언니를 잊은 건 아니라는 걸. 하지만 여전히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그 이유가 죄책감 때문인지 책임감 때문인지 혹은 그 둘 다인지, 그리고 자기 합리화일 거라는 생각에 불안했고 불편했다.
박정하고 냉혹하다 할 수 있지만, 괴로운 심사나 애끓는 슬픔도 하루가 지나면 하루만큼의 안개가 끼어 흐려진다.
데리다 도라히코, “도토리”
그렇게 할 거 다 하고 만날 사람 다 만나면서 한편으론 죄책감에 못내 잠들었던 어제 하루가 지났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일어난 내게 이 문장이 위로가 됐다.
박정하고 냉혹하다 할 수 있지만, 더 이상 언니의 기일에 울지 않는다. 하지만 언니를 잊은 것도 아니다. 언니의 죽음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졌던 내가 이젠 또 다른 방식으로 언니를 기억하는 것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