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mbrella Sep 08. 2021

내가 카프카의 ‘변신’을 ‘벌레’로 기억하는 이유

벌레 얘기가 나오지만, 벌레만 이야기하진 않아요.

우리 집은 벌레의 소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집에 엄마와 내가 얹혀살고 있다. 매일 그들을 마주한다. 돌아다니는 그들, 뒤집혀 있는 그들, 갓 태어난 그들.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접시고 커튼이고 할 것 없이 돌아다닌다.


그 집에서 우린 삼 년째 살고 있다. 벌레를 잘 잡던 엄마는 이젠 벌레를 휴지로 잡지 못한다. 벌레를 잡을 때의 촉감을 이기지 못하겠단다. 크기에 상관없이 벌레를 무서워하던 나는 이제 어떤 벌레든 잘 잡는다. 그 집에서의 삼 년이라는 시간은 우리를 이렇게 바꿔놓았다.


잠에서 깨 화장실을 보러 가는 순간조차 벌레를 밟지 않을까 걱정한다. 역시나 그가 기어간다. 그를 잡으려 휴지를 뜯는다. 그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를 죽이고 손을 씻는 나를 봤다. 한 존재의 체액이 묻었을까 염려하며 손을 닦는 나. 애써 그는 유해한 존재라며, 징그러운 존재라며, 죽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며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문득 고등학교 때 읽었던 카프카의 ‘변신’이라는 소설이 떠오른다. 그는 왜 자신의 모습을 ‘벌레’로 변신시켰을까. 그리고 ‘충(蟲)’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왜 사람들은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웃을 때 벌레라는 존재를 끌어들일까.


잠에 들기 위해 애써 외면했던 그의 체액을 떠올린다. 그의 존재는 유해할까. 왜 우리는 그의 이름을 호명하는 것조차 꺼리는 걸까. 왜 나는 이 글을 쓰는 순간조차도 그를 한 번도 호명하지 않은 걸까. 그 벌레가 바퀴벌레라고,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은 걸까. 인터넷에서조차 그는 ‘바선생’으로 불린다.


나는 왜 벌레를 혐오할까. 우리는 왜 벌레를 혐오할까. 나보다 다리가 많아서? 나와 다르게 더듬이가 있어서? 그래 결국 결론은, 나와 다르게 생겨서인가?


그를 싫어하는 내가 싫다. 하지만 그를 싫어하는 것을 멈출 수 없다. 그를 향한 혐오를 멈출 수 없는 내가 싫다. 하지만, 도저히 그를 혐오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그를 혐오하지 않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아니 나는 어쩌면 그 방법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인정하면 된다. 그들 눈엔 나도 벌레라는 걸 인정하면 된다. 아니, 벌레 그 이상의 존재일 거다. 바퀴벌레 눈엔 나만큼 끔찍하고 거대하며 징그러운 존재도 없을 거다. 자기의 종족을 죽이고, 먹이로 가장한 독을 곳곳에 뿌려대는 못된 존재. 그들 눈에 나 역시 벌레다. 그걸 인정하면 된다. 우리는 우리 서로에게 벌레, 아니 끔찍한 존재고,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의 난, 적어도 오늘의 난 그들을 인정할 수 없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의 존재를 눈감아 줄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그들의 공존을, 필통 속에서 날 반기는 그들의 존재를 환영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올까. 내가 나와 다른 존재를 진정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래, 평생 못할지도 모른다. 그걸 인정하는  오히려 답인 걸까. 김애란 작가가 말해줬듯이.*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18쪽.



레’로 기우리 집은 벌레의 소굴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집에 엄마와 내가 얹혀살고 있다. 매일 그들을 마주한다. 돌아다니는 그들, 뒤집혀 있는 그들, 갓 태어난 그들. 그들은 밤이고 낮이고 접시이고, 커튼이고 할 것 없이 돌아다닌다. 억하는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