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덕분에 더 나은 세상을 살 수 있어서. 내가 착해서가 아니라.
난 엄마와 이모가 버겁다. 동시에 그들을 사랑한다. 이 오묘한 사랑의 동기는 인류애와 책임감이라는 단어에서 온다.
엄마와 이모는, ‘엄마와 이모’ 이전에 ‘언니’다. 나보다 먼저 삶을 살아온 그리고 지금은 함께 사는. 하지만 나와는 조금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듯한 언니들.
어느 날 이모네 가게에 놀러 간 적이 있다. 그때 들었던 이모의 말이 내 머리에 박혀 잊히지 않는다. “은진아. 내가 만약 그때, 00여상에 갔다면 내 인생이 지금 어떻게 달라져 있었을까? 난 그게 상상조차 안 가.” 시끄러운 동대문 종합 시장은 한순간에 진공의 공간처럼 고요해졌다.
반면, 우리 엄마는 그런 ‘만약’조차 가정하지 않는다. 내가 학교에 갔더라면, 내가 대학교에 갔더라면 이라는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엄마는 매일의 노동에서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더 나은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거란 일말의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에게 희망은 오롯이 ‘나’다. 그 희망에 가끔 숨이 막힐 때도 있지만, 매일 그것으로 인해 죽을 것만 같은 압박감을 느끼지 않는다.
‘엄마’라고 불리는 언니의 기대는 때론 나를 옥죄지만, 어떨 때는 나를 미치도록 슬프게 만든다. 꿈을 꾸지 않는 엄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엄마. 자신이 당한 모욕감이 모멸감인지 모르는 엄마. 아무것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너무 익숙해져 무뎌져 버릴 수밖에 없었던 건지, 무던함을 택해버린 엄마가, 내 나이 많은 언니가 너무너무 가여운 순간이 있다.
그래서 난 엄마와 이모를 뿌리치지 못한다. 이건 내가 착해서, 라기보단 일종의 책임감과 고마움 때문이다. 내가 그들 덕분에 조금 더 분노하고, 감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것에 대한 고마움에서 비롯된 책임감. 이걸 단순히 내가 착해서, 착한 딸이라서 그런 거라고, 세상이 곡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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