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누아투는 남태평양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다. 몇 분마다 일어나는 화산 폭발을 두 눈으로 보고,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수중 우체국에 편지를 붙여보는 경험만으로도 이 나라에 갈 이유가 충분했지만, 내가 바누아투에 가보고 싶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2006년의 세계 행복지수 조사에서 세계 최빈국 그룹에 속하는 나라이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로 선정됐던 나라.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다.
지구의 생동하는 힘을 느껴보기 위해 방문한 바누아투의 탄나 섬 - 탄나 섬에는 몇 분마다 폭발하는 활화산 야수르 산이 있다 - 은 도착과 동시에 나와 아내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상 그 이상이었다. 한 예로 창고처럼 생긴 허름한 공항에서 수하물을 오래 기다리게 될 것은 예상했지만, 수하물이 나에게 오는 방식을 예상하기엔 상상력이 부족했다. 수하물이 왜 이렇게 안 나오지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우리 앞으로 다가오는 두 남자, 리어카 안에는 탑승객들의 수하물이 놓여 있었다.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은 당황스럽고 비현실적인 일들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를 여행의 재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길 잘한 것이, 그러지 않았다면 내 여행은 망했을 것이 분명하다.
숙소를 가려고 공항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어째 분위기가 이상했다. 차는 몇 대 안보이고 차를 가진 사람들은 각자 손님들을 태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차가 한 대만 남았을 때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편의를 위해 가이드로 부르기로 한다. 안타깝게도 이름을 잊어버렸다)이 내리더니, 이 섬에는 버스나 택시가 없단다.
일단, 공항에서 국제 미아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숙소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렸는데, 주유기는 안 보이고 드럼통만 몇 개 비치되어 있었다. 드럼통과 차를 호스로 연결해 직접 주유하는 최첨단 셀프 시스템! 이제는 슬슬 재미있어진다.
도로는 온통 비포장도로였다. 두 시간 탔지만, 스무 시간은 탄 듯한 피로감에 녹초가 되어 숙소에 도착했더니 이번엔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다. 집주인은 집 바로 앞의 전용(?) 해수욕장을 자랑했지만, 전기에 대해서는 ‘전기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가요?’ 라고 묻는 듯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날 우리는 전기와 단절된 채, 강제로 ‘Earth hour(지구촌 불끄기 행사)’에 참가하게 됐다.
하이라이트는 저녁 식사였다. 집 주인이 우리에게 치킨 요리를 저녁 식사로 준비하려는데 먹겠냐고 물어봤다. 바누아투 현지식도 궁금하고 해서 먹겠다고 답하자 주인은 불도 안 켜진 어두컴컴한 부엌으로 들어갔다. 슬슬 땅거미가 지는 시간이라 자기들도 바깥이 더 잘 보이는지 칼을 들고 나오는데, 그 칼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망나니가 썼을 것 같은 직사각형의 큰 칼,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지만 녹이 잔뜩 슬었을 것 같은 그 칼을 보자마자 이미 배가 불러버렸다. 저 칼로 치킨 요리가 가능할까? 설마 닭도 직접 잡아 오는 건 아니겠지? 집 주인께는 죄송하지만 식사를 안 하겠다고 말씀드리고, 그날 저녁은 굶었다.
내가 괜히 바누아투에 대한 환상을 깬 것은 아닌가 싶은데, 만약 그랬다면 환상을 깨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바누아투는 여행에서 마주치는 반전도 상상을 초월하지만, 자연의 아름다움도 상상을 초월하는 나라이다.
가이드와 약속했던 ‘한국으로 돌아가 다른 손님을 바누아투로 여행 보내기’를 위해 바누아투의 위엄을 잠깐 소개하자면, 화산재로 뒤덮인 야수르 산의 정상에 오르면 거대한 폭발음과 지구의 힘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때로 화산탄이 날아다니기도 하지만, ‘지구가 살아있음’을 의외로(?) 위험하지 않게 -다른 활화산들은 한 번 터졌다 하면 주변 도시가 마비되지 않나?- 그것도 몇 분에 한 번씩 느낄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바다도 그 아름답다는 남태평양 한 가운데인 데다가 아직 사람들도 많이 찾지 않은 곳이니 그 아름다움은 굳이 미사여구를 동원하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할 것이다. 이름 없는 섬에서 스노클링만 해도 웬만한 스쿠버다이빙 포인트 뺨치는 아름다움을 뽐낸다. 다만 아쉬운 게 있다면,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수중 우체국을 방문했는데 안에 우체부(분명 사진 속에는 편지를 수령하는 스쿠버 다이버 우체부가 있었다)가 없었다. 우체부가 왜 없는지 직원에게 물어봤더니 일 년에 한 번만 우체국 안에 있단다. 아쉽지만 수중 우체통에 편지만 놓고 왔다.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는 특수 편지(가격도 꽤 비쌌다)에 편지를 쓰고 힘들게 잠수해서 수중 우체통 안에 넣고 왔는데, 결과는? 이쯤 되면 예상했을 것이다. 편지는 오지 않았다.
서론이 길어졌다. 앞서 말했든 내가 바누아투를 여행 간 목적은 따로 있었다. 나는 3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행복지수 1위 국가답게 이 나라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조사가 틀리지 않았다면 무엇이 가난한 이 나라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을까? 이들과 우리나라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생각보다 쉽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숙소를 가는 도중에 마을이 하나 보였다. 마을 인구를 다 합쳐봐야 스무 명도 안 될 것 같은 작은 마을이었다. 사람들이 밖에 모여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마을 체육대회를 하는 듯했다. 가이드가 여기가 바로 자기가 사는 마을이라고 하자, 우리는 한번 둘러보고 싶다고 말했다. 가이드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우리는 가이드의 가족과 사진 촬영도 하고 체육대회 구경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마을 사람들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오두막처럼 생긴 집에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었다. 예전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어렵게 살던 시절, 이웃들끼리 서로 도우며 살던 그 시절의 모습이 겹쳤다.
어쩌면 행복을 푸는 첫 번째 열쇠가 여기에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이 마을에 복잡한 일은 없어 보였다. TV도 없고, 차도 없고(돈을 벌어오기 위한 가이드의 차가 유일했다), 아침이면 눈 비비며 찡그린 얼굴로 나가야 하는 직장도 없다.(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사 등의 1차 산업과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거로 보였다). 사람 사는 모습들이 단순하다 보니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 구분도 없었다. 그저 마을 공동체 안에서 더불어 사는 삶, 적당히 먹고 살 만큼 벌면 집으로 돌아와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호모 루덴스의 삶.
당연히 이 마을 사람들은 타인과 나를 비교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존재할 뿐, 각자 맡은 일만 충실히 하면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남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경쟁 상대가 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탄나 섬에서 기분 좋은 충격과 공포를 경험하고 방문한 수도 포트빌라는 내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달랐다. 잘 포장된 도로, 해안가에 들어선 현대식 건물, 최신식 리조트 등을 보며 이 나라에도 현대 물질 문명이 들이닥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만 봐도 남과의 비교는 한국인의 오래된 특성인 듯하다. 문제는 이런 특성이 갈수록 심화된다는 데 있다. 나는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경제 수준보다 현저히 떨어지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대학 간판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다 보니 학교 교육은 좋은 대학간판을 달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학벌주의와 대학 서열화 속에서 경쟁의 필연성을 절감해버린 부모들은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구상 어느 나라에 우리나라 학생들보다 힘들게 사는 학생들이 있을까? 학교, 학원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나 없이’ 사는 학생들은 크게 네 갈래로 나뉘게 된다.
첫 번째는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여 경쟁에서 살아남았는데 지금 하는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어서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모른 채 시류에 떠밀리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부모의 기대에 못미처 시작부터 미끄러지는 경우인데, 여기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어긋나는 경우가 많다. 네 번째, 나머지 극소수의 학생들만 부모의 기대를 채우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더 높은 고지에 오르기 위해 내 옆에 앉아 있는 친구도 밟고 일어서야만 하는 비정한 세계를 겪고 나면 남을 경쟁상대로만 여기게 되고, 남과 나를 비교하는 행동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된다. 남과의 비교가 습관화되니 모든 행동에서 타인의 눈을 의식하고, 튀지 않는 무난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타인의 기준에 끼워 맞추게 된다. 어느 순간 ‘나’가 실종되어 버린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 참가자를 대상으로 3박 4일간 휴대폰, SNS, 사람과의 만남을 차단하고 ‘절대 고독’의 시간을 주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했다. 이른바 고독 연습 프로젝트.
“내가 누구인지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어요. 대학 못가면 끝인데...”라고 말하는 냉소적인 고3 학생, SNS에 푹 빠져 사는 여대생, 혼자 있으면 불안해져서 주말에도 아르바이트 하는 쇼핑몰 운영자 등 참가자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금단현상을 호소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은 온종일 의식하고 살면서 정작 나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 ‘상실의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잃어버린 나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하루에 한 시간씩 걸으며 ‘혼자가 되는 시간’을 갖고 있다. 주로 아이들이 잠든 밤이면 그날 날씨나 감정에 어울리는 음악을 BGM으로 깔아놓고 무작정 걷는다. 바다가 보고 싶으면 바닷가까지 찾아가 걷기도 하고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이면 아무도 밟지 않는 눈을 밟아보기 위해 학교 운동장을 걷기도 한다. 행선지는 그때그때 다르다. 걷다 보면 헤드폰으로 들리는 음악에 집중하기도 하고, 눈앞의 풍경을 보며 스치는 잡념들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언제나 생각의 끝은 나에 대한 것들이다. 우리가 상대방의 생각을 알려면 그 사람과 대화를 해야 하듯이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일부러라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자존을 지키며 ‘나답게’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데, 어떻게 나답게 살 수 있겠는가?
TV 대신 책을 가까이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TV는 사람을 멍 때리게 만든다. 보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는 이유이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위해 TV를 본다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문제는 내가 TV를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 한다 느낄지라도 실제로는 TV에서 내보내는 것을 무비판적,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이 신경 쓰지도 않을 것 같은 PPL 광고가 왜 있겠는가? 반면,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을 보는 ‘나만의 창’이 만들어진다. 공감 능력이 생긴다. 책을 읽으며 저자와 대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창이 만들어지고 그곳을 통해 나만의 생각이 만들어진다. 이는 다시 나와의 대화로 이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SNS를 멀리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요즘 카페인(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중독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SNS에 올라온 사진들과 자신의 삶을 굳이 비교하며 ‘애써’ 주눅 드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행동은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을 위해 하루 일거수일투족을 SNS에 남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알렉스 퍼거슨이 늘 의문의 1승을 거두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SNS에 들어가 그 사람의 삶에 관심 가질 시간에,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삶을 위해 잘 나온 사진을 고를 시간에, 스스로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당신의 인생을 위해 훨씬 나은 선택이다.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위해 해야 할 일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더 받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내가 ‘좋아요’라고 할만한 일들을 더 많이 찾는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TV 광고를 소개한다. 일본 리크루트 회사의 광고인데 삶에 대한 통찰과 인생을 살아가는 혜안을 2분 안에 담아낸 명작이다. BGM과 각 장면의 조화도 인상적이지만, 특히 광고 카피가 예술이다.
“오늘도 계속해서 달린다. 누구든 달리기 선수이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 되돌아갈 수 없는 마라톤 코스. 라이벌과 경쟁해가며 시간의 흐름이라는 하나의 길을 우리는 계속 달린다. 보다 빠르게,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저 앞에 밝은 미래가 있을 거라 믿으며, 반드시 결승점이 있을 거라 믿으며...
인생은 마라톤이다”
여기까지는 평범해 보인다. 주인공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반전이 시작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인생이란 그런 것인가?
아니야. 인생은 마라톤이 아니야. 누가 정한 코스야? 누가 정한 결승점이야? 어디로 달려도 좋아. 어디를 향해도 좋아. 나만의 길이 있어. 우리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세상은 아주 넓어. 그래, 발을 내딛는 거야. 실패해도 좋아. 돌아가도 좋아.
누구랑 비교 안 해도 돼. 길은 하나가 아니야. 결승점은 하나가 아니야. 그건 사람의 수만큼 있는 거야.
모든 인생은 훌륭하다. 누가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했나?”
이 짧은 광고 안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다 들어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할 필요 없다.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따라갈 필요 없고, 길이 없으면 길을 내면 된다. 다른 사람이 다 한다고 나도 따라 할 필요는 없으며, 다른 사람이 못 한다고 내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길은 결국 사람의 수만큼 있는 것이다.
당신만의 길을 가고 있다면, 가던 길 마저 가라.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당신의 길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당신만의 길을 걸어라.
모든 인생은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