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단상
캄캄한 밤이었고,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갑자기 내 앞에 있던 차들이 일제히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나도 도로변으로 차를 옮기는 순간, 맨 앞에 있던 차에서 앳된 얼굴의 여성이 급히 내리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뒤 차에서 내린 중년 남성 한 분은 1차선으로 내달렸다.
둘의 표정에서 사고가 났음을 직감했다.
나도 모르게 쎄-한 느낌이 들어 왼쪽을 쳐다보니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주변으로 상당량의 피가 흘러나와 있었다. 미동조차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게 분명했다. 다들 처음 겪는 상황에 뭘 해야 할지 모르고 갈팡질팡했다.
다행히 내 뒤에서 오던 트럭 한 대가 쓰러진 남자 앞쪽에 차를 세우더니 비상등을 켰다. 2차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119 신고는 된 상태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교통경찰로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 상황을 알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렇게, 그 길 위에서 삶과 죽음이 갈렸다. 같은 공간 안에서 누구는 저세상으로 갔고, 나는 살아 숨 쉬며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란 것이, 그렇게 얇았다
사고가 수습되고 다시 행선지로 향하던 길, 만감이 교차했다. (사고를 낸 것으로 추정되는) 맨 앞 차에서 내린 앳된 여성의 겁에 질린 표정과 그녀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죄책감, 한 사람의 죽음과 그 죽음을 맞이하게 될 가족들의 슬픔, 그 당황스러운 순간에서 2차사고 방지를 위해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트럭 아저씨의 의연한 대처, 모든 장면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그 전까지 누구든지 예상 밖의 일로 세상을 떠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당연히 평균 수명 이상의 천수를 누리다가 영화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유언을 남기고 편히 눈을 감는 장면이 나의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그날 세상을 떠난 그분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그렇게 허망하게 차가운 도로 위에서 세상을 떠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날 이후로 나는 ‘예상보다 빨리 세상을 떠날 수도 있음’을 생의 옵션에 넣게 됐다. 인간이 죽음을 맞을 때, 자연사, 병사, 사고사 중 하나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데, 그 전에는 생각도 안 해 봤던 병사, 사고사의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다. 사실 누구나 편히 세상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애써 외면해서 그렇지, 우리 주위만 보더라도 병사나 사고사를 당하는 경우는 흔하디 흔하다.
먼저 병사의 경우, 나이가 들수록 주변에서 누가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횟수가 잦아지는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사람의 의지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운명이 극복의 대상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때로 ‘거부할 수 없는 운명’도 있는 듯하다. 나 또한 불치병에 걸린다면 남은 가족을 위해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지만,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라 느껴진다면 운명을 거스르고 싶지는 않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에 감사하며 살면 되는 것이고,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남은 시간을 가능한 행복한 순간으로 채우고 남은 삶을 정리하면 된다.
다음은 사고사.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모험의 성격을 갖는 것들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가능성이 조금은 클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날 아내에게 내가 만약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하더라도 하고 싶은 거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거라면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쉬움은 남지만 후회는 없기에 여한은 없다고, 그러니 슬퍼할 필요 없다고 미리 말해두었다. (영화 『체이싱 매버릭스』의 실제 주인공 제이 모리아티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날 길 위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해야 했던 여러 죽음과 그 즈음 책에서 얻은 죽음에 대한 통찰을 통해 나는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독일 격언)”는 단순한 진리를 깨달았다. 세월호 사건이 던진 여파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큰 배가 그리 허망하게 가라앉아 304개의 우주가 사라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죽음이 언제 나를 찾아올지 모르니 그때를 대비에 미리 유언장을 써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MBC 이용마 기자의 영향도 컸다. 정부의 언론 장악 시도 속에 고초를 겪으면서도 끝까지 맞서 싸운 언론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공범자들』을 보면, 분노에 몸서리쳐지다가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장면이 있다. 투쟁 과정에서 복막암 판정을 받고 요양 중인 이용마 기자 인터뷰 장면이 그것이다. 그토록 건강해 보이고 당차 보이던 이용마 기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병마에 지쳐버린 눈동자가 생의 허망함을 느끼게 했다.
왜 신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하지 못할까? 정작 나쁜 사람들은 잘만 사는데 말이다.
지방에서 요양 중인 그를 찾은 전 직장 동료가 지금 뭐하면서 지내냐고 묻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글을 쓴다고 했다. 나는 그 글이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남게 될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우리 사회를 위해 쓰는 것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의 마음이 전해져 눈시울의 온도가 급상승했다.
예상치 못한 죽음에 남은 사람들이 떠올리게 마련인 게 떠난 사람과 마지막으로 헤어지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인사라도 살갑게 할 걸 하필 그때 그러지 못했다는 진한 아쉬움과 뒤늦은 후회. 미리 유언장으로 평소 남기고 싶었던 말들을 기록해둔다면, 보내는 사람들도 마음이 덜 아프지 않을까? 최소한 글을 통해 ‘마지막 인사’는 한 셈이니까.
흔히들 유언장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쓰면 된다 생각하지만,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 앞에서 죽음의 공포에 잠식되지 않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제 삶을 정리하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른다.
하여 나도 미리 유언장을 써놓기로 했다. (내가 평소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 책에 담았으니 이 책도 일종의 유언장인 셈이다) 유언장을 쓰면서, 가끔 죽음에 대해 깊이 사유하게 되면서, 나는 삶을 더 사랑하게 됐다. 죽음이라는 주제 자체에 필요 이상으로 천착하여 ‘어차피 죽을 거 살아 뭐하나’로 빠지지만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사유는 더 나은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작년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장례 절차를 도와주시던 장례 지도사가 있었다. 국내 굴지의 항공사 기장 출신이라는 얘기를 들어서 어떤 사연으로 장례 지도사가 됐는지 궁금했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속 깊은 얘기는 나누지 못했다. 다행히 일하는 틈틈이 짧게 몇 마디는 나눌 수 있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화를 하나 옮기자면,
“이 일을 하다 보면 느끼는 게 많겠어요?”
“네. 죽음을 초월하게 됐어요.”
그의 대답에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만나다 보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체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죽음을 초월하는 것도 가능하겠다 싶어서였다.
물론 죽음을 초월한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죽음에 ‘초연’해질 수는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삶이라는 게 결국 죽음을 향한 여정 아니던가.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게 우리 인생이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우리 삶에 죽음만큼 공평한 게 있는가 하는. 어쩌면 세상사 중 유일하게 공평한 것일지도 모른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힘 센 자든 힘이 약한 자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필요 이상으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이 우리가 죽기 전에는 죽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살아있을 때 살아있음에 늘 감사하면서, 살아있는 동안 행복한 삶, 후회 없는 삶을 살다가 위에서 부르면 살짝 아쉬워하면서 떠나면 된다.
생화가 조화보다 아름다운 이유는 그렇게 아름답던 꽃도 결국 시들고 지기 때문이다.
삶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삶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