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Oct 26. 2018

그래, 나 빨간 머리야

호주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귀국 2주 전. 내가 다니던 일자리의 계약 기간은 이미 끝나있었다. 마땅히 할 일도 없고, 돈이나 더 벌자고 하루나 이틀 일할 자리를 알아봤다. 구직 사이트를 뒤지다가 눈길이 머무는 제목을 발견했다.

‘◇∼◇일 이틀 동안 일하실 분. 강한 체력 가지신 분. 군대에서의 행군 경험 있으신 분 환영. 배낭 메고 오셔야 함.’


나를 위한 맞춤형 일자리 같긴 한데 왜 배낭을 메고 오라 하는 걸까? 의문을 갖고 전화를 걸었다. 시드니 시내를 걸어 다니면서 가정집 우편함에 피자집 전단지를 넣으면 되는 아르바이트라고 했다. 대부분 가정에서 광고 전단지를 싫어하기 때문에(그중 몇몇은 직접 전화해서 항의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사람이 지나다닐 때는 다른 일을 하는 척 연기하라는 애정 어린 조언과 함께 체력에 자신 있는지를 되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체력은 자신 있다고 대답하자 구두 계약 완료! 


다음 날 여행용 배낭을 메고 피자집을 찾아갔더니 사장님이  일터(?)로 안내했다. 차에는 전단지가 대략 6,200장쯤 쌓여있었다.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을 예감했지만, 음악 들으면서 즐겁게 일하기로 마음먹고 각 가정으로부터 환영받지 못할 비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부디 날 욕하지 말고 피자집을 욕해주시길...) 


난 두 가지 이유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가방이 생각보다 무거워서였고, 또 하나는 수많은 우체통 중에 같은 우체통모양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아파트는 제외하고) 이 나라 사람들은 학교에서 우체통 만드는 교육이라도 받는 걸까? 이 나라에서는 우체통이 집의 정체성을 상징하기라도 하나? 정말이지 세상 모든 종류의 우체통이 다 모인 듯 했다. 획일화된 집과 우체통만 보고 살아온 나로서는 각 가정의 우체통 디자인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지루할 틈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디 우체통뿐인가? 길거리에서 남이 보든 말든 두 손 잡고 걸어가던 게이 커플, 20센티미터도 족히 넘어 보이는 깔창을 장착(?)한 신발을 신고 유유히 걸어가던 청년,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취해 춤추면서 걸어가던 학생... 나처럼 뒤돌아 그들을 쳐다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나라였다면 사람들의 시선을 한데 모으고도 남았을 장면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다양성에 대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는 듯 했다. (그런데 왜 인종이 다름에는 관대하지 않은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지들끼리는 그래 보였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왜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걸까? 왜 튀는 사람은 남의 눈총을 받아야 하는 걸까?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우리나라 특유의 집단주의적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고 싶다.  ‘일단 나라가 잘 살아야 나도 잘 살 수 있는 거니까 각자 하고 싶은 거 있더라도 꾹 참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자’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와 같은 희생적인 태도가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에 큰 역할을 담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 옛날 독일에 파견되었던 광부들과 간호사들을 떠올려보자)


지금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이제 더 이상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서는 젊은이는 없지만, 집단주의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전하다. (집단주의가 낳은 권위주의와 권위주의가 낳은 꼰대들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빠르다)   

  

어려서부터 모난 돌이 정 맞으니 튀지 말라는 얘기를 들으며 자라온 우리는 눈치 보며 다수의 편에 붙는 게 편한 길임을 직감적으로 알아버렸다. 다수의 편에 붙든 말든 그건 개인의 자유니까 그렇다 치더라도이것이 늘 소수에 대한 차별로 이어지는 게 문제다. 나랑 생각이 다르면 넌 왜 생각이 다르냐며 날 선 말이 오가고, 소수는 다수를 위해 당연히 희생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버린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하던 사람들도 다수에 속하면 소수에 대한 차별을 저마다의 논리로 정당화한다.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지 못할 때 흔히 일어나는 일들이다. 

언제나 피해자는 소수에 속하는 약자들이다. 그래서 개개인의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의 시작은 소수의 상처를 보듬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대학 시절의 일이다. 제주도의 지하 클럽에서 펑크록 밴드 노브레인가 공연을 하던 날. 공연이 끝나고 빨간 머리에 징 박힌 가죽바지와 가죽 자켓을 걸친, 누가 봐도 튀는 복장을 한 그들의 뒤를 밟은 적이 있다. 당시만 하더라도 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고 눈치를 살피며 살던 시절이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어떻게 감당할지 궁금해서 따라갔던 거였다.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당당한 걸음걸이로 제 갈 길 가던 뒷모습이 어찌나 멋있던지! 언젠가 보컬 불머리(노브레인 보컬의 별명)가 인터뷰에서 말했다. 우리나라 사회가 다양성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고. 그로부터 우리 사회는 얼마나 바뀌었나? 


지금도 불머리는 빨간 머리를 하고 다니며 “이젠 내게 더 이상의 말은 하지마. 예전의 내가 아니야. 난 변했어. 그래 나, 빨간 머리야♬♪” 라고 노래한다. 빨간 머리를 하고 다녀도 눈총받지 않는 사회였으면 한다.          

이전 05화 나를 바꾼 말 한마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