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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May 28. 2020

김자반은 나눌 때 현실이 된다

한식이 가르쳐 준 나눔의 미학

세상에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란 게 있을까? 한 때 나에게 그런 음식이 있었다.

김.자.반.

이름부터 다소곳한 김자반씨를 처음 만난 건 의 자취방에서였다.

"형, 배고프지 않아요? 간단히 먹을 거 없어요? 라면이라도 있으면 제가 끓일게요"

서로의 주머니 사정을 너무도 잘 알았기에 차마 나가서 먹자고 말할 수 없었던 나는, '간단히'에 강조점을 두어 가난한 자취생의 곳간을 탐하는 미안함을 덜고자 했다.

"라면은 어제 내가 다 먹었고, 잠깐만 기다려봐"

전자렌지로 햇반 돌리는 소리가 들렸고, 잠시 후 형은 햇반과 함께 김자반 봉지를 들고 왔다. 듣도 보도 못했던 생소한 음식이었다.

"김은 여러번 먹어봤는데, 김자반은 뭐예요?"

"이거 안 먹어봤어? 라면 끓이는 것도 귀찮을 땐 이거만한 게 없어"


김자반을 한 숟갈 떠서 찰진 쌀밥에 뿌려 입에 넣는 순간, 내 미각 중추에서는 축제의 전야제가 열렸다. 듣도 보도 맛보도 못했던 맛이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에다 바삭바삭한 ASMR, 달콤 짭쪼롬한 끝맛까지... 저 멀리서 남해 바다 특유의 짠내음이 햇빛의 온기를 가득 머금은 바닷 바람에 실려오는 듯했다.

이렇게 맛있는 걸 왜 이제서야 처음 먹었을까? 남이 차려준 거라 맛있었던 아닐까? 지금 내가 배고파서 맛있 건 아닐까? 뜨거운 감정배제하고 차가운 감각으로 '맛' 음미하고자 온 신경을 미각 중추에 집중하여 한입을 더 먹었다.

첫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 단짠(단맛, 짠맛)의 조화를 넘어 땅(쌀)과 바다(김)의 대화합이었고, 음양의 조화가 살아있는 맛이었다. '감칠맛이 5가지 기본 맛에 해당되는가'의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찧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맛이었다.

김자반을 먹고 나서 감칠맛은 5가지 기본 맛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는 감칠맛파 과학자들의 의견에 동조하게 됐다. 감칠맛은 '단맛도, 신맛도, 쓴맛, 짠맛도 아니지만 맛있는 맛'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단어라던데, 김자반에는 분명 '단신쓴짠'의 틀로 가둘 수 없는 오묘한 뭔가가 있었다.


난 금세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얼굴이 되어 형에게 말했다.

"형, 고마워요. 이런 음식이 있다는 걸 알려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자반을 5지 사서 그 날부터 아침, 점심, 저녁 반찬으로 김자반만 먹었다. 이런 감칠맛이라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그랬다. 셋째날 까지는...


넷째 날 깨달았다.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란 없음을.

하긴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고 맛있는 음식이 존재한다면, 특히 그 음식이 김자반 같은 채식이라면, 그 음식은 노벨평화상을 받아 마땅하다. 지구상 모든 사람이 김자반의 환상적인 맛에 빠져 한달 동안 김자반만 먹는다고 상상해보라. 지구상 몇 억마리 가축의 생명을 구할 것인가? 지구 온실가스의 몇 %를 감축할 수 있을 것인가? (가축 사육으로 발생하는 온실가스는 지구 전체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의 절반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 그럴 리가 없는 거다. 나는 여전히 김자반이 맛있고 지금도 가끔씩 먹을 때마다 이런 음식 또 없다 감탄을 하곤 하지만, 해도 해도 질리지 않는 게 없듯,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는 맛은 존재하지 않는다. 얼핏 듣기로는 외국의 채식 주의자들에게 김이 맛있는 채식으로 급부상한다던데, 우리나라의 한식 연구가들도 이런 점을 적절히 파고들어 한식의 세계화를 앞당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중에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라는 경제학 용어를 알게된 후, 많이 먹으면 먹을 수록 음식이 질리는 현상의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 일정한 기간 동안 소비되는 재화의 수량이 증가할수록, 그 재화의 추가분에서 얻는 한계 효용은 점점 줄어든다는 법칙

(Daum 검색)


우리가 맛있는 빵을 사먹는다고 치자. 너무 배가 고파서 10개를 샀다. 언제가 가장 맛있을까?

처음 먹는 빵! 조금씩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 뒤로 갈수록 맛이 없어진다. 배가 부르기 시작하면 그 때부터는 그 맛있던 빵도 먹는 게 고통이다.

술도 그렇다. 소주나 맥주나 첫 잔은 달디 달다. 그러나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가기 시작하면 쓴 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고, 나중엔 '술아일체'의 경지가 되어 이게 술인지 물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김자반을 나흘 연속 먹다가 결국 질려버린 일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세계 김자반 요리 경연대회'를 열어 1위를 수상한 김자반 요리를 내게 가져다 준다 해도 그 날 자취하는 형의 집에서 먹었던 '첫 김자반'의 맛을 따라올 수는 없을 것이다. 설사 그 때의 김자반 맛을 능가하는 김자반 요리가 있을지라도 여러번 먹다보면 질다. 그렇다면 김자반을 어떻게 먹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나눠 먹는 것이다.

가끔 먹되, 먹을 때 함께 나눠 먹는 것.

혼자 배 터질 때까지 먹는 게 아니라 '함께, 적당히 배부를 정도로, 나눠 먹는 것'.


김자반을 한봉지 샀다고 치자. 혼자 먹을 때, 첫 술에 느끼는 만족도를 100이라고 하면 두번째 숟가락에는 만족도가 90, 세번째 숟가락에는 80... 이런 식으로 맛의 만족도가 떨어진다. 이 김자반을 10명이서 나눠 먹으면? 한 숟가락씩 먹게 될 지라도 모두 100의 만족도를 느낄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나눔의 미학이다. 



우리 한식에도 이런 나눔의 미학이 있다. 김장 담글 때를 떠올려 보라. 이건 애초에 혼자 담그고 먹을 사이즈가 아니다. 그래서 김장을 담글 때에는 여럿이 함께 일하고, 일이 끝나면 함께 만든 김치를 나눠준다.

찌개도 그렇다. 저녁에 찌개를 혼자 끓여 먹는다고 해보자. 1인분만 해먹기는 재료가 아깝기에 최소 2-3인분의 찌개를 끓이게 된다. 혼자 먹으면, 찌개는 남는다. 남은 찌개를 냉장고에 뒸다가 다음 날에 또 먹으면 분명 어제 먹을 때보다 맛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찌개를 가장 맛있게 먹는 방법도 나왔다.

그 자리에서,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것.


그러고보니 한식에서 발견한 나눔의 미학  좌우명에 적용시켜 한식 캐치프레이즈로 활용하면 딱이겠다 싶은 게...


내 좌우명은,

Happiness is real when shared

(행복은 나눌 때에만 현실이 된다)

니까,




요렇게 바꿔보 어떨까.


Kimjaban is real when shared

(김자반은 나눌 때에만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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